"조국위해 모든 재산과 생명 바치리라" 맹세
이경희 선생은 어려서 서당을 다니며 한학을 배우다가 1895년 고향에서 소학교를 다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생이 왜 서울의 기호학교에 다니게 된 지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당시 영남인사가 중심이 된 교남교육회도 학교 설립을 목표로 삼았지만 현실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신문물을 배우기 위해 서올로 가 기호학교에 입학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경희 선생은 1908년 기호학교의 중등교육과정인 본과에 입학해 우등상을 수상하고, 1909년에는 2학년으로 진급해 그해 7월 여름 방학식에서 우등상을 받았다. 이처럼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던 선생은 기호학교에서 근대 교육을 수학하면서, 국권을 상실하며 식민지로 전락한 민족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비전을 모색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기호학교에서의 수학은 향후 교남교육회, 달성친목회, 대한협회, 협성학교, 대동청년단, 신민회 산하 청년학우회 등 애국계몽 및 비밀결사 활동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된다.
1910년 한일합방은 또다시 운명을 바꿨다. 신민회 청년학우회가 일제에 의해 강제해산 당하면서 서간도로 망명을 떠난 것이다. 청년학우회 한성연회의 대표적 인물은 이경희 선생과 함께 이동녕, 이회영, 윤기섭, 김좌진, 이규봉, 장도순 등이었다. 이경희 선생의 따님 이단원 여사는 "'조국의 위해 재산과 목숨을 바친다'는 맹세를 하고 청년학우회 멤버들이 만주로 망명을 떠났다"고 말했다. 신용하 교수는 '근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신민회가 한일합방 이후 일제의 의해 강제해산되자) 청년학우회에서 이경희, 이동영, 이회영, 김좌진 등 7명을 뽑아 간도로 파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이 1910년 12월 독립군 기지 창건 선발대로서 서간도에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주체세력이 되었던 점에 미뤄, 이경희 선생도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관여했을 개연성이 아주 크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한 기록이나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경희 선생이 서간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지속했다는 점이다. 함경남도 단천 출신 독립운동가 조훈(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선생이 이경희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면서 자신의 여동생(이단원 여사의 친모, 당시 18세)을 이경희 선생(당시 33세)과 결혼시켰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이경희 선생은 상당한 재력가로 알려진 대구 서씨 상조의 딸(1881~1909년)과 혼인했지만 두 자녀를 두고 일찍이 사별한 상황이었다.
이경희 선생의 부친 병두 공은 고종 임금이 직접 칙유를 내려 만나보고 싶어 했을 만큼 당시 '명의'로 이름을 날렸다. 이런 전후 사정을 고려할 때, 선생 집안의 재산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생은 재산을 모두 팔아 치운 뒤 가족을 데리고 서간도로 망명을 떠났다. '조국을 위해 재산과 생명을 바친다'는 맹세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이경희 선생의 막내딸 이단원 여사는 "아버지는 서간도로 망명하기 전에 고향인 대구로 돌아왔고, 당시 중환이시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장례를 치른 뒤 재산을 정리했다"면서 "미처 팔지 못한 산격동 땅과 그 외 땅은 그대로 둔 채 계모와 동생 둘(이 중의 한 명이 독립운동가 혜은 이강희 선생임)을 데리고 서간도로 망명했다"고 증언했다.
안타깝게도 이경희 선생의 서간도 생활과 활동을 알려주는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이경희 선생 본인은 생전에 독립운동에 대해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따님 이단원 여사가 어릴 적 어머니에게서 들은 단편적인 기억이 전부다.
증언에 따르면, 이경희 선생은 정리한 재산을 가지고 서간도에 달신학교와 중국어학교를 세워 경영했고, 무송현에서 수만 평의 땅을 조차해 둔전을 개발했다. 이를 통해 군자금을 조성하고 청'장년을 훈련시켜 독립운동 전선에 내보내는 일을 추진했다.
"(오빠의 중매로) 시집을 온 어머니가 집안의 창고를 여니까, 독립군 군복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기라. 이걸 어떻게 빨긴 빨아야 하는데,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고 한숨만 나오더라 카더라. 도저히 혼자서는 할 수 없고, 동서와 같이 끌어내 강가에서 죽도록 빨래만 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했다."
이단원 여사의 증언은 또 이어진다.
"당시 (중국인) 무송현 현감과 아버지(이경희 선생)의 사이가 각별했던 것 같아. 학교 운동회가 열리는 날, 단상에 있던 현감이 현감부인을 시중들던 하녀에게 자리를 옮겨 어머니에게 가서 시중을 들라고 지시를 했어. 아마도 (학교를 세운) 교장 선생님 부인이라고 예우를 했던 것 같아. 어쨌든 고생 고생 끝에 마적들이 우글대는 만주에서 나름대로 자리를 잡았어……."
이경희 선생의 망명생활은 갑작스레 막을 내린다. 무기를 숨겨둔 것이 일본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 정부에 발각된 것이다.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현감에게서 급히 연락이 왔어. 무기를 숨겨둔 것이 만주국 정부에 발각됐으니 어서 피신하라고. 잡히면 꼼짝없이 사형이었지. 이것저것 살필 틈도 없었어. 갓난아기였던 큰언니와 어머니만 데리고 빈손으로 압록강을 건넜지. 다른 가족은 그대로 서간도에 남아있었다고 해. 함께 도망칠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상황이 급박했던 것 같아. 재산도 그대로 서간도에 모두 남겨두었지……."
무일푼으로 경성(서울)으로 돌아온 이경희 선생 가족은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지인의 도움으로 낙산 밑 빈민촌에 겨우 셋방 한 칸을 마련할 수 있었다. (독립운동가) 남편은 밤낮없이 밖으로만 돌아다니고, 독립운동가의 아내는 그때부터 무당집 유모, 삯바느질, 날품팔이 등 먹고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뭐든지 해야 했다. 이후 생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 "나(이경희 선생 부인) 죽거든 절대로 인천 이씨 선산에 묻지 말라"고 유언을 했을 정도였다. 만해 한용운 선생도 이때 가끔 이경희 선생댁을 들렀다. 이경희 선생이 만해 선생의 회갑을 맞아 회갑기념수첩에'不擇細流'(불택세류: 넓고 큰 마음과 사고를 지낸 사람은 모두를 포용하고 아우를 수 있다는 뜻)란 글을 써 선물한 것도 이맘때쯤이다.
◆이경희 선생이 활동한 단체들
▷교남교육회: 1908년 3월 서울 보광학교에서 발기인 박정동 등 145명이 모인 가운데 창립했다. 이경희 선생은 기호학교에 재학하면서 계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교남교육회는 경북의 부호 장길상의 집에 임시사무소를 두고, '교육으로써 변화해가는 세계에 대처해야 함을 강조'했다. 회원 가운데 안희제는 대구 협성학교 교사를 지냈고, 이경희 선생도 대구 협성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이경희 선생은 향후 자신의 활동과 관련된 주요 인맥을 이곳에서 형성했다.
▷달성친목회: 1908년 9월 청년층의 친목도모와 교육 실업 장려를 목표로 결성된 계몽운동 단체. 이 단체는 대한협회 대구지회와 함께 계몽운동의 청년조직 역할을 했다. 일제는 달성친목회와 관련, "대한협회와 행동을 같이하고 비밀리에 배일사상을 고취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했다. 또 교남교육회와도 연대하고 있었다. 교남교육회는 "교육과 친목이 그 이름은 다르나 장려하는 것은 같다"는 공식문서를 달성친목회에 보냈다.
▷협성학교: 1907년 11월 경북관찰사 이충구의 노력으로 개교한 사립 중등학교. 대한협회 대구지회와 학교 임원 선정 및 운영에 대해 상호협의 하였다. 이경희 선생은 안확, 윤세복, 홍주일 등과 함께 교사로 활동했다. 협성학교가 교세를 확대하자, 친일성향의 경북관찰사 겸 대구군수 박중양은 방해공작을 펼쳐 협성학교를 제2공립보통학교로 전환하려 하였다. 이에 교남교육회가 개입해 사태를 조사하고 박중양에게 유감을 표명했다.
▷대동청년단: 1909년 10월 안희제, 서상일, 남형우, 이원식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이경희 선생은 단원으로 활동했다. 단원 중 안희제, 윤병호, 남형우, 서상일 등은 백산상회의 주주였다, 1910년대에는 국내 비밀결사와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 상해 임시정부 등과 연계되어 있었으며, 군자금 모집과 인재 육성, 국내외 민족운동 세력과의 연락 등의 활동을 했다.
▷청년학우회: 신민회 중앙본부가 1909년 8월 창립한 청년운동단체이다. 각 지방에 연회를 두기로 하고, 1910년 3월 한성연회를 정식 결성했다. 이경희 선생은 청년학우회 한성연회 검찰원으로 활동했다. 특히 청년학우회의 이회영, 이동녕, 이규봉 등과 한성연회 장도순 등이 한일합방 이후 서간도로 이주하여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주도했다는 대목은 주목할 만하다. 이경희 선생도 이들과 함께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참여했다는 설도 있다.
사진/ 박환 교수의 만주지역 한인유적답사기(국학자료원, 2012) 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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