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부는 왜 이렇게 심술이 난 걸까?" '흥부전'을 읽으며 물었더니 아이는 "흥부가 자꾸 밥을 달라고 하잖아"라고 했다. 그리고는 "밥은 어차피 놀부의 것이니까 놀부 마음대로 하면 돼"라고 했다. 일곱 살 아이의 영악한 대답이다. 잠자코 있던 아이 엄마도 맞장구를 쳤다. "맞네, 놀부가 가진 것은 놀부 마음대로 하는 게 맞지." 그러니까 그 누구도 놀부의 재산처분권을 제한할 수는 없다는 논리다. 나도 질 수 없었다. "놀부가 부모님 재산을 독차지해서 부자가 된 거잖아. 그러니까 흥부도 밥을 달라고 할 권리가 있어." 그러자 아이는 "아니야. 원래 흥부가 태어나기 전에는 놀부밖에 없었어. 그러니까 전부 다 놀부 거야"라고 했다. "무슨 말이야?" "아빠, 내 동생이 태어나기 전에 아빠가 사준 장난감은 다 내 것이라고 했지? 아빠가 내 장난감은 동생한테 안 줘도 된다고 했지? 놀부도 그런 거야."
그러니까 나는 흥부의 관점에서, 아이는 놀부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읽은 것이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생긴 것일까? 육아서에는 늦둥이가 태어나면 큰아이가 소외감을 느끼기 쉽기 때문에 큰아이만의 영역을 만들어 주라고 한다. 내 경우에는 동생과 나이 차가 한 살밖에 나지 않아서인지 그런 소외감을 느꼈던 적은 없었는데, 내 아이는 동생과 여섯 살 차이가 나기 때문에 둘 사이에는 시차가 생기게 된다. 즉 동생에게 형은 자신이 태어나면서부터 항상 있어온 존재이지만, 큰아이는 동생이 전에 없었다 나타나서 자기 영역을 침범하는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놀부 심보란 형의 초조함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놀부는 대책 없이 아이만 많이 낳은 흥부에 비해 경제적 합리성이 있었고, 흥부가 자기 주제도 모른 채 제비의 부러진 다리를 고쳐주는 수고를 하는 것에 비해 놀부는 재산 증식의 수단이 된다면 제비 다리까지도 부러뜨릴 만큼 과감함도 갖춘 인물이었다. 교육부 공무원이란 자가 "민중은 개'돼지라 먹고살게만 해주면 되고, 신분 격차가 존재하는 사회가 합리적인 사회"라 했다는데, 이런 합리성과 과감함은 제 집에 찾아온 제비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것과 얼마나 다른 것일까.
정부와 개인, 국민과 난민, 부자와 빈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갑과 을 사이에 시차가 없을 수야 없겠지만 시차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부족한 사회는 '합리성'이라는 이름의 놀부 심보가 보편화된다. 하지만 다리 부러진 제비도 날아오를 날이 있고, 입에 박씨를 물고 돌아올 날이 있다. 좁은 자기 중심주의를 넘어 내 형제를, 가난한 자를, 심지어 동물까지도 환대하라는 '흥부전'의 정신을 망각한 개인과 사회에게 남은 것은 실렁실렁 박 타는 날 맛보게 될 호된 몽둥이뿐일지도 모른다. 박 타는 날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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