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준의 대담] 엄홍길 산악인·엄홍길 휴먼재단이사장

입력 2016-07-10 19:38:54

"히말라야 16좌 성공할 즈음 희생당한 동료·네팔의 빈곤 산 아래 사람 보이기 시작했다"

사진=이성근 객원기자
사진=이성근 객원기자

히말라야에는 에베레스트를 비롯해 해발 8,000m가 넘는 봉우리 14개가 있다. 여기에 주봉과 산줄기가 같아 독립봉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하지만 산악인으로서는 더 없이 중요한 두 개의 봉우리(얄룽캉, 로체샤르)가 있다.

영화 의 실제 주인공 엄홍길, 그는 이 16개의 봉우리, 즉 16좌를 모두 오른 세계 최초의 산악인이다. 22년 동안 38번 이 봉우리들을 향해 인간의 한계를 넘는 도전을 했다. 20번 성공하고 18번 실패를 했다. 그 과정에서 10명의 동료를 잃었다.

그는 지금 또 한 번의 도전을 하고 있다. 그를 받아주고 살려서 돌려보내 주었던 히말라야가 있는 나라 네팔에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짓고 있다. 또 먼저 간 산악인들의 유가족을 지원하는 일과 청소년, 대학생들의 활동을 조직'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 "오로지 정상을 향해 올랐으나 언제인가부터 산 아래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그의 말이 뜨겁다.

영화 이야기와 학교 짓는 이야기 등, 서울 장충동 에서 그와 나눈 '휴먼 도전'의 이야기를 옮긴다.

김병준: 영화 잘 봤다. 감동적이었다. 본인과 동료들의 이야기인데 영화를 본 기분이 어땠나?

* 편집자 주: 2004년 5월 계명대 산악부의 박무택 대장과 장민 대원은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다. 하지만 하산길, 정상 바로 아래에서 조난을 당했다. 이들을 구하기 위해 홀로 올라간 백준호 대원 역시 조난을 당했다. 영화 는 이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산악인 엄홍길 손칠규 등이 결성한 휴먼원정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엄홍길: 시사회 때 이야기이다. 10년도 더 된 일이 마치 한두 달 전의 일처럼 격하게 느껴졌다. 영화가 끝났는데도 몸이 의자에 붙은 듯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냥 눈물이 나왔다. 마치 그때처럼.

김병준: 그때라면?

엄홍길: 박무택의 시신을 수습해 내려오려고 사투를 벌이다 끝내 성공하지 못하고 돌무덤으로 안장했을 때다. "무택아, 언제 너한테 다시 오겠나. 이제 모든 걸 내려놓고 네 갈 길 가라." 발길은 떨어지지 않고 눈물만 나왔다.

김병준: 꼭 그곳에 가야 했었나?

엄홍길: 그렇다. 특히 박무택은 친동생이나 다름없었다. 2002년 에베레스트를 비롯해 8,000m 이상을 4번이나 같이 올랐다. 그런 친구가 완전히 실종된 것도 아니고, 정상 가는 길목 사면에 자일에 묶인 채 달려 있었다. 그냥 두면 영원히 그렇게 있을 것 아니냐? 태극마크까지 몸에 붙이고 말이다.

김병준: 가능하다고 생각했나?

엄홍길: 8,750m 지점이다. 숨 쉬는 것조차 힘든 높이다. 그런 곳에서 시신을 수습해서 내려온다? 모두들 포기하라 했다. 또 다른 희생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만둘 수 없었다. 가지 않으면 평생 그 죄책감과 후회를 안고 살아갈 것 같았다.

김병준: 영화로 만들겠다는 생각은 언제 했나?

엄홍길: MBC가 휴먼원정대 전 과정을 찍어 1부와 2부로 방영했었다. 그때 시청자들의 반응이 매우 좋았다. 하지만 유가족들에게는 또 한 번의 큰 슬픔이 되었다. 나 자신에게도 그랬고…. 그래서 그때 이걸로 마무리하자고 했다. 영화로 만들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거절했다.

김병준: 그런데 이번에는 어떻게?

엄홍길: 영화 의 윤제균 감독이 찾아와 설득했다. 안 된다고 버티다 결국 받아들였다. 이유는 하나다. 생명의 존엄이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이나 약속이 점점 더 가볍게 여겨지는 것 같아서였다. 영화를 통해 우정과 희생, 그리고 인간에 대한 사랑 등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김병준: 충분히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엄홍길: 영화를 만드는 분들에게 몇 가지 당부를 했다. 절대로 흥행이나 오락 위주로 흘러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절대로 유가족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 등이었다.

김병준: 네팔에 학교를 짓고 있다고 들었다.

엄홍길: 그렇다. 지금까지 11개를 지었다. 일단 16개를 지을 계획이다. 히말라야 16좌를 모두 오르게 된 데 대한 나 나름의 감사 표시이다.

김병준: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나?

엄홍길: 늘 저 위쪽 정상만 보고 올랐다. 그러다 16좌 등정이라는 목표가 가까워지면서 산 아래가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이 보이고 동네가 보였다. 우리 역시 가난하게 산 적이 있어서일까. 특히 그 척박한 환경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크게 눈에 들어왔다.

김병준: 참으로 의미 있는 말이다. 성공을 향해 달리는, 그리고 일에 깊이 빠져 있는 모든 사람들이 들었으면 한다.

엄홍길: 그러고도 한동안 산에만 올랐다. 그러면서 산에 기원했다. "16좌 등정 후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짓겠습니다. 저를 받아주시면 살아남은 자로서 이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특히 2007년 마지막 16좌, 로체샤르를 오르며 이를 간절히 기원했다.

김병준: 그만큼 어려웠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엄홍길: 3번 실패를 한 곳이었다. 2003년 두 번째 원정 때는 동료 2명을 잃었다. 3,000m의 절벽, 정상을 직선거리로 20m 정도 남겨놓고 눈사태를 맞아 떨어지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 그 공포와 두려움이 어떠했겠는가? 그러고도 다시 시작한 4번째 도전. 산에 간절히 빌었다. 살아 돌아가 그 약속을 지킬 수 있게 해 달라고.

김병준: 정말 기적 같은 일들이 있었다고 들었다.

엄홍길: 70~80도 경사의 3,000m 암벽을 거의 앞꿈치로만 올라갔다. 눈사태에다 낙석과 낙빙 등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다 셰르파가 약 300m 정도 떨어졌다. 그런데 눈이 쌓인 곳에 떨어져 무릎만 다쳤다. 기적이었다. 후배 한 명도 발가락 열 개를 다 잘라낼 정도로 고통을 앓았다. 그러고도 성공했고 모두 살아서 돌아왔다. 산이 도운 것이다.

김병준: 자, 이제 그 약속을 지켜야 할 차례다.

엄홍길: 사실 나 혼자 산에 한 약속이었다. 공표한 것도 아니었다. 돈도 없고 방법도 없다는 핑계로 슬쩍 접으면 그만이었다. 실제로 16좌 성공에 취해 잠시 잊기도 했었다. 그러나 곧 정신이 돌아왔다. 스스로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주변분들과 상의를 했더니 함께하겠다는 분이 나서기 시작했다. "아하, 이게 될 수도 있겠구나." 용기가 생겼다.

김병준: 하지만 돈을 모으는 게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엄홍길: 맞다. 당장에 일을 시작하기 위해 드는 기초적인 비용부터 걱정이었다. 그러던 중 파라다이스 복지재단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각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긴 사람들에게 상을 주는데 내가 특별공로상을 받게 되었다는 거다. 본상이 아니고 특별공로상이니 상장이나 하나 받나 보다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상당한 액수의 상금을 받게 되었다.

김병준: 다시 산이 도왔나 보다.

엄홍길: 받으면서 바로 말했다. 이 돈은 내 돈이 아니라 먼저 간 동료를 포함한 산악인 전체의 돈이라고…. 그리고 이 돈을 네팔에 학교 짓는 데 쓰겠다고. 그리고는 바로 엄홍길 휴먼재단을 설립했다. 학교 짓기의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김병준: (벽에 걸린 제1호 학교 사진을 보며) 저게 바로 처음 지은 학교인가?

엄홍길: 그렇다. 어디다 지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러다 해발 4,060m의 팡보체라는 오지 마을에 짓기로 했다. 같이 에베레스트를 오르다 1,000m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셰르파가 살던 마을이다. 동네 처녀와 결혼한 지 불과 4개월, 빙하 속으로 떨어져 시신도 찾지 못한 동료였다. 그 죽음에 대한 빚을 갚고 싶었다.

김병준: 그 높은 오지마을에? 건축자재나 제대로 운반할 수 있나?

엄홍길: 가까운 비행장까지 22인승 쌍프로펠러 경비행기로 실어 와 거기서 다시 2박 3일을 걸어서 자재를 날랐다. 그뿐 아니다. 단열 시공 등 제대로 튼튼히 지으려면 외부 기술자가 필요한데 숨쉬기도 불편한데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겠나. 게다가 서울서 돈을 구해야 하는 나는 그곳에 계속 있을 수도 없었다. 자재가 제때 못 오고, 또 돈 못 주면 공사 중단되고…. 정말 8,000m 봉우리 올라가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김병준: 하지만 결국 해냈다. 지금도 계속 그런 고지에 짓고 있나?

엄홍길: 그다음부터는 주로 해발 500~700m 지역에 짓고 있다. 낮은 지역이지만 모두 저런 곳에 어떻게 학교를 지을까 하는 곳이다. 물론 교육수요, 생활환경 등 모두 고려해서 짓는다. 2호, 3호, 4호…이제 11호까지 지었다.

김병준: 주민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일이 될 것 같다.

엄홍길: 그들도 그냥 받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주로 짓기만 한다. 땅은 그곳 정부나 지역사회가 제공해야 한다. 그리고 학부모들도 허드렛일 등을 같이 한다. 이렇게 참여해야 이들 스스로 자신들의 학교로 여기게 된다.

김병준: 돈이 많이 들어갈 것 같다.

엄홍길: 잘 지으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어 기존 학교들은 창이 작다. 창이 깨지면 교체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밖을 잘 볼 수 있게 창을 크게 낸다. 또 지역의 특수성도 반영한다. 예를 들면 햇볕이 따가운 지역에는 햇살이 교실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가리개를 설치하고, 물에 잘 잠기는 지역은 기초를 그만큼 올려 짓는다. 여기에 현대식 화장실, 냉'온방 시설, 수도시설 등. 이러다 보니 하나 짓는데 3억~5억원이 들어간다.

김병준: 누가 크게 도와주지 않으면 못할 일 같다.

엄홍길: 다행히 기업이나 기관 등도 참여하고 있다. 아웃도어 옷 만드는 한국 밀레가 학교를 하나 지었고, 외교부 산하 국제협력단(KOICA), 신세계백화점, 현대오일뱅크, 그리고 대구에 있는 디케이락이라는 중소기업 등이 그렇게 했다. 대구시교육청도 하나 짓기로 했다.

김병준: 대구시교육청이?

엄홍길: 그렇다. 학생들이 사랑의 동전 모으기를 한다. 동전을 모아 여러 가지 좋은 일에 쓰는데, 그 일환으로 네팔에 학교를 짓기로 했다.

김병준: 교육청 교사들 재교육이나 학교운영 노하우를 전하는 일 등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엄홍길: 사실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짓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유지보수 등 지속적으로 운영하는 문제와 교육역량 강화 문제 등 할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런 문제에 있어 대구시교육청이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김병준: 히말라야에 오른 산악인으로 네팔을 위해 이런 일을 한 경우가 많은가?

엄홍길: 에베레스트를 처음으로 오른 힐러리경의 경우 히말라얀 트러스트(Himalayan Trust)라는 재단을 설립하여 자신과 같이 등정했던 셰르파들의 마을에 학교와 보건소를 지었다. 또 루크라 지역에 작은 비행장을 짓기도 했다. 2008년 세상을 떠났는데, 그 이후로도 이 재단은 이런 일을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그 외는 잘 없는 것 같다.

김병준: 엄홍길 휴먼재단도 계속 더 많은 일을 해 나갈 수 있었으면 한다.

엄홍길: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또 성공한 산악인으로서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한다.

김병준: 전문 산악인으로 생활이 넉넉지 않은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이들의 문제를 고민하는 것도 큰 일이 될 것 같다.

엄홍길: 후배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직장을 다니다가도 원정을 가려면 직장을 그만둬야 한다. 휴직을 인정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또 어려운 도전에 성공을 해도 다른 스포츠처럼 연금이 있는 것도 아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부분이다.

김병준: 끝으로,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던 적이 수없이 많았을 것 같은데…그 기분을 말해 줄 수 있나?

엄홍길: 8,000m 이상 봉우리만 38번을 도전했다. 셰르파 4명, 한국 동료 6명, 모두 10명을 잃었다. 위험한 상황이 되면 매 순간 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알았을 때는 오히려 편안한 마음이 된다. 오로지 산에 나를 맡긴다. 삶도 죽음도 넘는 것이다.

김병준: 돌아가는 길에 그 뜻을 새겨 보겠다. 오늘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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