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學)으로 본 '70'] 70년 전 대구 어떤 일이?

입력 2016-07-06 16:56:52

70년 전인 1946년 대구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광복 직후 우리나라는 좌'우익의 대립으로 극심한 혼란기를 보였다. 좌익세력은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을 결성했고, 우익 쪽은 '남조선 대한민국대표 민주의원'(민주의원)을 개원했다. 매일신문이 처음 태어난 1946년 당시 대구와 우리나라로 떠나본다. 신복룡 저 '한국분단사 연구', 대구경북역사연구회 저 '역사 속의 대구, 대구 사람들', 정해구 저 '10월 인민항쟁 연구' 등의 자료를 참고했다.

◆콜레라 창궐과 수해

1946년 5월 대구지방에 콜레라가 발병했다. '한국분단사 연구'에 따르면 당시 1만여 명의 사람들이 콜레라에 감염됐으며, 이 중 1천200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신복룡은 '한국분단사 연구'에서 "당시 대구 인구는 10만 명 정도였으니, 콜레라 환자가 1만 명이나 되고 사망자가 1천200여 명에 이른 것은 정말 온 도시가 그 병에 짓눌린 형국이었다"고 썼다. 하지만 콜레라 감염에 대비해 경비, 통제, 격리를 담당하는 통행검문소의 관리는 허술하기만 했다. 군정 당국은 대구 주변에 검역소를 설치할 것을 지시했고, 이에 따라 간호원과 보조원을 포함해 하루 평균 100여 명의 의대생이 교수들의 지도 아래 의사, 학생, 국방경비대원들로 구성된 기동반에 편입됐다. 그러나 콜레라 확산을 막기엔 역부족이었으며 1천200여 명의 사람이 사망하기에까지 이르렀다.

그해 6월에는 또 대구지방에 수해가 발생해 쌀 대체작물이 큰 피해를 입었으며, 수해로 인해 곳곳의 도로가 끊기면서 교통마저 두절됐다. 그 때문에 구호품이 도착하지 못해 대구는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는 기록이 있다.

◆10월 항쟁의 발발

대구경북역사연구회가 지은 '역사 속의 대구, 대구 사람들'의 기록에 따르면 1945년 11월에 쌀 한 말 가격은 140원이었다. 그러나 1946년 9월 말에는 1천500원으로 폭등하는 등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10배 이상 올랐다. 게다가 배급되는 식량마저도 군정 관리들이 중간에서 가로채거나 자신들의 친인척에게 우선 배분하는 경우가 많아 식량을 배급받는 시민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으며, 많은 서민들은 풀뿌리나 나무껍질로 허기진 배를 채워야 했다.

시민들은 10월 1일 정오 대구시청 앞으로 몰려나왔다. 약 1천여 명의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쌀을 달라며 시위를 한 것. 또 오후 2시 30분 대구역 앞에서는 9'24동맹 파업에 들어간 노동자 500여 명이 경찰과 충돌했고, 시위 진압 과정에서 경찰의 총기 발사로 시위대 10여 명이 사망했다. 10월 항쟁으로 미군정은 대구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전차를 앞세워 무력진압을 하면서 대구에서의 항쟁은 일단락됐지만, 그 여파는 경남북은 물론 다른 지역으로 확산됐다. 그해 11월까지 전국 90여 개 군에서 항쟁이 일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1946년 대한민국 5대 사건

1) 입법의원 개원=미군정의 자문기관으로 독립자주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 국정에 반영할 목적으로 설립한 입법의원이 1946년 12월 12일 개원했다. 정식명칭은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의장에는 김규식, 부의장에는 최동오'윤기섭이 선정됐다.

2) 좌익,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결성 =1946년 2월 15일 좌익통일전선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이 결성됐다. 의장은 여운형이었다. 민전에는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민당, 독립동맹, 전평, 전농, 청년총동맹, 부녀총동맹, 조선문학가동맹 등 좌익계 29개 정당사회단체가 참여했다.

즋 조선정판사 위폐사건=1946년 5월 7일 미군정 수사대가 조선공산당 본부와 공산계 신문을 발행하는 조선정판사가 자리 잡고 있는 서울의 한 빌딩을 수색, 약 1천200만원에 달하는 위조지폐(당시 환율로 약 12만달러) 등을 발견했다. 조사 결과 조선공산당과 기관지 해방일보 등이 조선정판사에 있는 지폐 원판을 이용, 선전활동비 등 당의 운영자금을 마련하고 남한 경제를 교란시키기 위해 지폐를 위조한 것으로 드러났다.

3) 우익, 남조선 민주의원 구성=1946년 2월 14일 오전 10시 미군정청에서 '남조선 대한민국대표 민주의원'(민주의원) 개원식이 열렸다.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은 참석했지만 미군정이 그토록 공을 들였던 여운형은 불참했다. 민주의원은 반탁운동의 회오리 속에서 이합집산을 거듭했던 우익 측이 1월 23일 김구의 임정과 이승만이 힘을 합치면서 한국인 과도정부의 모체로서 비상국민회의를 결성하기로 합의하면서 결성의 급물살을 탔다.

4) 북한 토지개혁 실시=1946년 3월 5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토지개혁에 관한 법령'을 공포했다. 지주의 토지를 몰수해 노동자와 토지 없는 농민에게 무상분배하고, 농민의 지주에 대한 부채를 취소하며 관개시설, 산림 등을 몰수해 국유화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북한은 토지개혁 결과 66만 농가에 106만6천㏊의 농지를 분배해 한 농가에 평균 0.15㏊(450평)씩 돌아갔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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