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와 치열한 법정 싸움 대구産 이인
전국 민족지사 변론한 독립투쟁 표본
가인에 가려진 위대한 대구정신 살려야
가족 채용 물의를 빚은 서영교 의원에게 공천장을 주었다는 논란에 휩싸인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의 친할아버지는 초대 대법원장으로 '사법부의 초석'으로 평가받는 가인(街人) 김병로이다.
평소 가인은 "국록(國祿'나라에서 받는 급료)을 먹는 공직자들은 청렴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이는 모든 공직자에게 적용되지만, 특히 선출직 공직자에게는 금과옥조와 같다. 김 대표가 가인 할아버지의 철학을 속 깊이 알았다면 이런 물의성 공천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인은 법조인들에게 존경받는 스승이다. 그래서 예비 법조인들은 매년 가인법정변론대회를 통해 "정의를 위해 굶어 죽는 것이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 수만 배 명예롭다"는 가인의 정신(1957년 12월, 퇴임사 중)을 받드는 정의의 변호사가 되기 위해 투신한다.
그런데, 전북 순창 출신인 가인 김병로는 전국적인 존경을 받고 있지만, 가인처럼 아니 어쩌면 가인보다 더 치열하게 일제에 저항한 대구산 법조인 애산(愛山) 이인(李仁'1896~1979)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다.
애산은 구한말 대구 출신 애국지사인 이종영을 아버지로, 만주벌 독립운동가인 우재 이시영을 작은아버지로 둔 저항의 법조인이자 교육자이며 한글존중론자이다. 이종영은 보성사를 운영하며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한 장본인이다.
투쟁정신을 물려받은 애산은 대학 시절, '조선총독부의 학정을 세계에 호소한다'는 글을 통해 자주독립을 주장했다. 도산 안창호로부터 '날개 달린 호랑이'로 불리며 북만주에 한인무관학교를 세운 삼촌(우재)에게 필요한 군자금을 조달하다가 체포되어 모진 고초를 겪고도 의연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법정에서 저들과 싸우리라"는 결심을 굳히고, 법조인의 길로 들어섰다. 애산이 맡은 첫 변론은 1923년 5월의 의열단 사건. 의열단 멤버이던 최윤동(제헌국회의원)은 대구 동화사를 중심으로 독립자금을 마련코자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를 기도했다. 하지만 사전에 발각됐고, 주모자들은 기소됐다. 변론에 나섰다. 가인도 동참했다. 대구법원에서 진행된 이 변론에서 애산은 피멍으로 얼룩진 투사들의 몸을 보여주는 '나체 공판'을 통해 일제의 잔학상을 폭로했다. 이런 움직임은 결국 1927년 장진홍 의사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으로 되살아났다.
이후 애산은 630여 명이 기소된 일제강점하 최대 항일사건으로 훗날 광주학생운동으로 이어진 형평사 사건을 비롯하여 안창호사건'수양동우회사건'경성제대학생사건'만보산사건'수원농고 흥농사사건 등 전국 곳곳의 독립운동을 변호했다. 나중에는 조선어학회사건(1942년)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평생 반신불수가 되었다.
민족지사에 대한 변론 외에도 애산은 조선물산장려운동으로 상업을 일으키고, 후학양성(최송설당 여사의 김천고보 건립지원과 대구원화여고 재단이사장 역임)을 통해 민족문화를 진작시키고 인재를 키우는 데 전력을 바쳤다. 사후에 전 재산은 한글학회에 기부했다. 그의 위대함은 우리의 말, 글, 얼을 지켜야 한다는 정신과 실천에 있다.
이런 애산은 묻혀 있다. 가인이 법조계의 표상으로 전국적 존경을 받고 있는 데 반해, 대구 사일동 출신의 민족지사 애산 이인은 오랫동안 잊혀 있었다. 그러나 최근 애산기념사업회(공동대표 석왕기'이동수)가 생겨나고, 이번 주 토요일에는 비록 더부살이이기는 하지만 대구 동구에서 애산기념사업회 현판식이 열리고, 7월에는 애산 세미나도 열린다. 더 이상 대구정신의 표상인 애산 현창사업이 늦춰져서는 안 된다. 전 생애를 민족 독립에 헌신한 애산 이인을 그 고향인 대구에서 기려주지 않으면 우리는 독립된 나라에서 살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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