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슨 크루소' '80일간의 세계일주' '걸리버 여행기'. 오랜 기간 우리나라 어린이가 애독해 온 외국 소설이다. 이 소설들은 원래 어른을 대상으로 창작되었지만 한국에서 번역되는 과정에서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동용으로 탈바꿈하였다. 쥘 베른의 '해저 2만 리'(Vingt Mille Lieues Sous Les Mers'1869) 역시 그 중 하나이다. 오십 대 중반을 넘은 어른 중에는 어린 시절 읽었던 '해저 2만 리'의 유명 잠수함 '노틸러스호'를 지금껏 기억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리고 그들 모두 '해저 2만 리'를 어린이 공상과학소설로 기억하고 있다. 20세기가 가고 2000년이 지나서야 축약 형태의 '해저 2만 리'가 완역되었으니, 그렇게 착각하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해저 2만 리'가 우리나라 독자에게 처음 모습을 보인 것은 지금부터 100년도 훨씬 전인 1908년. 번역 당시 제목은 '해저여행'이었다. 1800년대 말이 되어서야 증기기관차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조선에서 깊은 바다 밑을 운항하는 '해저 2만 리'의 잠수함은 어쩌면 용궁보다도 더 비현실적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그 때문일까. 번역본 발표 당시 장르 명칭은 기이한 이야기 즉, '기담'(奇譚)이었다.
'해저 2만 리'는 당시 조선의 문화 수준에 맞추어 번역되었다. 생물학, 지질학, 지리학 등 원작에 등장하는 어려운 과학적 지식은 조선어 번역과정에서 가능한 한 축소, 생략되었다. 전통적 조선 소설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세밀한 풍경 묘사, 인물 내면 묘사 역시 번역과정에서 생략되었다. 조선인의 눈높이에 맞춰 생략에 생략을 거듭한 결과로 마침내 탄생한 조선어 번역본은 프랑스어 원작과는 많이 달랐다. 근대 과학 지식과 인간 내면 탐색으로 가득 찬 프랑스 소설 '해저 2만 리'는 사라지고, 기이한 모험담이 담긴 비과학적인 조선 기담 '해저여행'이 탄생한 것이다.
번역과 관련한 이런 문제가 발생한 데는 번역문체도 한몫하고 있었다. 1900년대 조선에는 근대적 과학 지식과 세밀한 사물 묘사로 가득한 과학소설 '해저 2만 리'를 원작 느낌 그대로 조선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는 새로운 문체가 성립되어 있지 않았다. 전달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당시 일반적이던 한문체를 그대로 번역문체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오랜 사투 끝에 지쳐 쓰러진 주인공들의 상황을 다룬 프랑스어 원작의 세밀하고 긴 묘사가 "포식일장(飽食一場)하고 불승혼곤(不勝魂困)하야"라는 상투적 한문체로 번역되는 순간, 원작의 새로움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세계적 문학상인 맨부커상을 수상하였다. 번역을 담당한 데버러 스미스와의 공동수상이다. 100년 전 '해저여행' 에피소드를 되돌아보면, 왜 번역자가 작가와 공동으로 수상한 것인지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한국어로 창작된 소설을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영어권 독자들의 이해를 더 높일 수 있도록 새로운 표현을 찾아내고 이를 발전시킨 것은 바로 영국인 번역자의 힘이었던 것이다. 번역은 단순히 언어 간의 차이를 넘어, 문화와 문화 간의 차이를 이해하고, 상호 전달하는 작업이다. 번역의 의미에 대한 이와 같은 깊이 있는 이해가 전제될 때, 우리 문학의 세계화는 어렵지 않게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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