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살 전투 중 박힌 수류탄 파편, 66년간 안고 살아"

입력 2016-06-24 19:26:09

6·25 전쟁에 소년병으로 참전한 윤한수 씨

22일 대구 중구 6
22일 대구 중구 6'25참전소년소녀병전우회 사무실에서 6'25전쟁 당시 소년병으로 참전한 윤한수 사무총장이 그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성일권 기자 sungig@msnet.co.kr

"그때는 무조건 전쟁에 나가야 되는 줄 알았지. 근데 후손들이 몰라주니 섭섭하지."

소년병 신분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윤한수(82'6'25참전소년소녀병전우회 사무총장) 씨. 스스로 '역사에서 숨겨진 소년병'이라고 소개하는 윤 씨를 24일 중구 동인동1가 소년병전우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소년병은 1950년부터 1953년까지 17세 이하의 나이로 군번을 받고 입대한 약 3만 명의 '참전용사'를 말한다. 대다수 국민은 6'25전쟁 당시 소년병의 존재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윤 씨는 "올해 교학사 등 교과서에서 처음 소년병이 언급된 만큼 우리는 철저히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었어. 정부 입장에서는 18세 미만의 어린 소년들을 전쟁으로 몰아넣은 치부를 스스로 인정하기 어려웠던 거지"라고 했다.

당시 15세였던 윤 씨는 소년들까지 전쟁에 동원한 이유를 이해한다고 말했다. "전력이 너무 부족했어. 남침 당시 북한군 전력은 17만 명인 반면 8월 4일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한 한국군은 3만 명만 남았을 뿐이지. 그러니 온 국민이 반강제로 전쟁에 동원됐지."

윤 씨는 친구 셋과 모병소를 찾았지만 군의관은 키 160㎝, 몸무게는 60㎏이 채 되지 않는 윤 씨를 돌려보냈다. 그러자 윤 씨는 학교장 추천서를 들고 다시 모병소를 찾았다. "그때는 정말 전쟁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었어. 그저 친구들을 따라 입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 같아서 죽기 살기로 입대했지. 전쟁이 그렇게 끔찍한 것이라는 걸 미처 몰랐어."

윤 씨는 전쟁의 참상에 대해 한 문장으로 표현했다.

"죽음에 이른 사람이 부르짖는 비명은 제아무리 대단한 연극배우라도 흉내 내지 못할 거야. 딱 일주일 훈련받고 1사단에 배치돼 영천전투에 투입된 첫날,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채 리어카에 실려가는 사람을 보고 돌부처처럼 굳어서 눈을 떼지 못했어. 고참이 정신 차리라며 내 엉덩이를 걷어차기에 겨우 걸음을 뗐지."

그는 전쟁에 익숙해진 뒤 시쳇더미가 쌓여 구더기가 들끓어도 등지고 앉아 주먹밥을 먹는 게 익숙해졌다고 했다. 윤 씨의 오른쪽 얼굴에는 영천전투에서 맞은 수류탄의 파편이 아직도 박혀 있다.

66년이 지난 현재, 윤 씨에게 전쟁의 기억은 썰물이 빠지듯 흐려졌지만 조국에 대한 서운함은 씻기지 않는다.

윤 씨는 "2005년에 국방부에 6'25전쟁 당시 소년병의 존재를 인정해달라는 진정을 넣었지만 돌아온 답변은 실망스러웠지. 이후 전우 600여 명의 병역 증명을 모아 청와대에 탄원을 넣고서야 2008년 6월 25일 소년병이 공식적으로 명문화됐다"고 했다.

윤 씨의 바람은 하나다. 소년병의 역사가 사라지지 않도록 소년병들을 위해 현충 시설이나 하다못해 기념비 하나라도 세워주는 것이다. 윤 씨는 최근 사진을 모으고 기억을 더듬어 책을 쓰고 있다. "책장에서 썩히는 한이 있더라도 책을 쓰면, 후손 중 누군가는 책을 발견해 우리를 기억해주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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