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대학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하여 졸업했지만 각종 아르바이트(벽화 그리기, 전시장 디스플레이, 미술학원 강사, 초상화 그리기 등)를 하는 후배들을 보면 가끔 "아르바이트는 작업을 하기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하며, 그 일에 빠져서 자신의 목적이 무엇인지 잊어버려선 안 된다"고 충고한다. 사실 그것이 정말 어렵고 힘든 일인 것을 알면서도 하는 말이다.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태어났지만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나 모든 역경을 딛고 대가로서 입지를 굳힌다는, 위인전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작가에게 요구하기는 어렵다. 미술계에도 요즘 말하는 흙수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집안의 재력이 뒷받침해주면 생계 걱정 없이 작업을 할 수 있어서 그만큼 목표치에 도달하기가 쉬우며, 그 재력을 이용하여 좋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유명한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많이 개최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예술가라도 경제적 문제에 빠져 방황하다 보면 결국 버티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봐왔다.
그리고 지금 활동하고 있는 미술가들 대부분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도 붓을 끝까지 놓지 않고 중견작가의 위치에 올라서서 미술시장에 자기 이름을 내놓고 작품 거래를 가끔 하며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다. 일반인들이 말하는 수억원에 호가하는 작품을 거래하는 작가는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대부분의 작가들은 그런 꿈을 꾸며 작업과 생계수단을 오가며 치열하게 살아간다.
이번 '그림 대작' 사건에 관한 미술계의 시선이 차가운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아직 검찰이 수사 중이지만, 연예인이라는 유명세를 앞세워 형편이 어려운 화가에게 낮은 수준의 보수를 주면서 그림을 대작하게 하여 고가의 작품으로 판매해 왔다는 것은 오랫동안 힘들게 작업한 작가들에게 모멸감을 주는 것이다. 관행이라는 명분을 내세운 것 또한 생계와 작업을 오가며 버티는 작가들에게 허탈감을 줬다. 미술계의 일이 검찰 수사까지 간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이번 사건을 단순히 대작과 관행의 문제로만 말하기에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들을 많이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
물론 대작을 하였든 아니든 간에 작가의 사인이 들어가면 그 작품이 작가의 얼굴이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들도 조수를 두고 작업을 한다. 그러나 이 땅에서 회화작품을 하는 대부분의 작가들은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작은 붓 터치 하나라도 열정과 정신을 집중해 나아가는 과정을 중시한다. 그것이 개념미술과 팝아트 이후의 현대미술을 이해하는 부분에서 보면 바보 같은 짓일지 모르지만, 그린다는 것 그 자체를 생명처럼 생각하는 화가들이 대부분이란 것을 명심하고 이 사건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댓글 많은 뉴스
박수현 "카톡 검열이 국민 겁박? 음주단속은 일상생활 검열인가"
'카톡 검열' 논란 일파만파…학자들도 일제히 질타
이재명 "가짜뉴스 유포하다 문제 제기하니 반격…민주주의의 적"
"나훈아 78세, 비열한 노인"…문화평론가 김갑수, 작심 비판
판사 출신 주호영 국회부의장 "원칙은 무조건 불구속 수사…강제 수사 당장 접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