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포르테(f)보다 피아노(p)가 아름답습니다

입력 2016-06-17 18:06:16

서양 음악에 있어서 강하게 연주하는 것을 의미하는 표시가 '포르테'(f)이다. 반대 의미인 작게나 약하게 연주하라는 표시는 '피아노'(p)이다. 수많은 성악을 포함해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자들은 포르테로 연주하는 것보다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고 한다. 왜냐하면 포르테 연주는 있는 그대로 역량을 마음껏 내면 되지만,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은 가진 역량을 다 속에 모아놓고 최대한 작고 절제된 소리로 집중하여 약하게 연주하여야 하기에 포르테보다 더 신경이 쓰이고 힘이 드는 것이다. 엄청난 소리인 포르테 연주가 감동이 더 클 수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필자의 경우만 봐도 연주자들의 절제된 '피아노' 연주가 더욱 큰 감동과 잔잔한 여운으로 남는다. 최대한 절제된 작은 소리는 깊은 감동을 넘어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빠져들게 된다.

한국 판소리도 마찬가지이다. 오래전 명창 안숙선 씨가 신문 초대석에서 이렇게 말한 것을 읽은 적이 있다. 그녀의 스승인 주광덕이라고 하는 분은 그녀가 9살 때 철없는 그녀에게 판소리를 가르치며 늘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기쁨과 슬픔을 다 지르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다 터트리지 않은 소리가 더 달고 깊다." 이 말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용감하게, 자신 있게 다 지르는 소리가 좋은 소리가 아니라 절제되고 깊은 작은 소리가 더욱 달고 좋은 소리라는 것이다.

인생의 전 영역에서도 이 원리는 똑같이 적용되는 것 같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너무 많은 사람이 자신의 주장과 소리를 '포르테'로 연주한다. 처음에는 듣기 좋을지 모르지만, 자꾸 들을수록 부담이 되고 천박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한국 사회를 바라보면 세대를 초월하여 너무 상대방이나 전체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소리를 너무 크게 내는 것 같다. 대단히 논리적이고 파괴력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너무 듣기 힘들 때가 있다. 자기 주장과 소리가 너무 커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들을 수가 없으며, 전혀 함께할 수 없는 자신의 소리만이 들린다, 강하지만 아름답지는 못하다. 그러나 절제되고 깊은 소리를 내는 사람은 여전히 오래도록 깊은 여운과 감동을 준다.

'절제'라는 말은 그리스어로는 '엥크라테이아'이다. 이 단어는 훈련과 어떤 목표를 위해 모든 부분에서 자제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옛날 그리스 사람들은 만나는 청년들을 향하여 두 가지 말을 반드시 했다고 한다.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을 다스리라." 절제라는 말은 자동차의 브레이크와 같은 것이다. 브레이크가 고장이 나면 자신도 죽고 남도 죽일 수가 있다. 깊고 성숙한 작은 소리는 나를 살리고 남을 살리기도 한다.

영국의 평론가 V. S. 프리쳇은 "조금만 깊이 파고들면 위대한 인물들에게는 한결같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근면함에 바탕을 둔 철저한 절제와 평범한 사람에게 없는 깊음이 있다는 것이다"고 했다. 오늘날 내가 깊이도 없는 너무 큰 소리를 내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 본다. 자신의 한계를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나치게 큰 소리를 내곤 한다. '피아노'로 소리 낸다는 것은 자신의 한계뿐만 아니라 지켜야 할 선을 안다는 것이다. 결국 '포르테'만을 연주하는 사람은 자신의 한계도 모르고 자신의 위치도 모를 뿐만 아니라 남과도 화음이 맞지 않게 된다. 성숙하고 깊은 소리를 내고 싶다. 오늘 나 자신의 인생 연주를 되돌아보며 이제부터 인생 2악장은 멋진 '피아노'로 연주하고 싶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