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언덕] 대구 야시장 찾을 이유는?

입력 2016-05-26 20:28:06

대구오페라하우스 야외광장에 세워진 호암 이병철 선생의 동상 앞에 허리가 구부정한 한 할머니가 찾아왔다. 키 작은 할머니는 연방 손을 뻗어 호암을 만지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발에도 손이 닿지 않았다. 경남 합천에서 왔다는 할머니는 "이병철 하면 우리나라 최고 갑부잖아. '돈병철'이라고도 부를 정도로 재산을 많이 모았지"라면서, "대구에 이병철 동상이 세워졌다는 소식을 얼마 전에 들었어. 이병철 동상이라도 만지면 부(富)의 기(氣)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무작정 찾았지"라고 했다.

6년 전인 2010년 3월 5일 자 매일신문 1면에 실린 기사다. 당시 대구시가 이병철 삼성 창업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오페라하우스 야외광장에 호암 동상을 세웠다. 이에 기자는 호암 동상에 '거부(巨富) 스토리'를 입혀 관광지로 만들자는 취지로 기사를 썼다.

며칠 뒤 대구시는 '호암 동상을 거부(巨富) 기원 새 명소로 만들겠다'는 정책을 밝혔다. 삼성의 발상지인 삼성상회 터에는 삼성기념공간을 지어 호암 동상과 구 제일모직 공장 부지를 잇는 '삼성의 흔적' 관광상품을 개발하겠다고 했다.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홈플러스까지의 도로는 '호암로'라는 이름도 붙였다.

지난주 오랜만에 오페라하우스를 다녀오면서 호암 동상을 찾았다. 동상을 받치는 기단이 낮아졌을 뿐 변한 것은 없었다. 부자 스토리를 알리는 그 흔한 안내판도 없었고, 1시간가량 머무는 동안에도 동상을 찾는 사람은 드물었다.

동상을 바라보다 보니 자꾸만 이달 초 여행했던 이탈리아 북부도시인 베로나가 떠오르며 비교가 됐다. 베로나는 줄리엣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의 생가를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베로나를 찾는 것이다. 그녀의 집은 언제나 관광객으로 붐빈다. 줄리엣의 동상 앞에는 그녀의 가슴을 만지기 위해 언제나 긴 줄이 형성된다. 가슴을 만지면 연애운이 트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스토리가 담겨 있기 때문. 얼마나 쓰다듬었는지 청동 젖가슴은 반짝거렸다. 작은 줄리엣의 집 앞마당은 젊은이들로 가득 차 있고, 골목을 따라 언제나 가슴 만지기에 동참할 관광객의 줄이 늘어서 있다. 인근 커피숍과 아이스크림 가게는 덩달아 언제나 만원이다. '줄리엣'은 지금도 베로나의 핫이슈로 살아있다. 골목을 따라 늘어선 모든 건물들은 '혹시 로미오의 집이었을지도 모를' 스토리의 주인공이 된다.

줄리엣을 관광 상품화시킨 이탈리아인의 지혜가 놀랍다. 사실 줄리엣은 실존 인물이 아니다. 셰익스피어가 희곡 속에서 지어낸 상상의 여주인공. 그럼에도 줄리엣의 자택과 동상을 구체적 현실로 바꿔놨다. 베로나 외곽 수도원 지하엔 그녀가 잠든 석관도 있다는 얘기에 혀를 내둘렀다. 당연히 석관은 비어 있을 터이다.

대구시는 내달 3일 개장하는 서문시장 야시장을 전국 최대 규모의 밤 명소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야시장은 최근 불고 있는 전국적인 현상이다. 행정자치부가 2013년 일자리 창출과 관광 활성화를 위해 '야시장 활성화 사업'을 벌이면서다. 이후 부산의 부평깡통야시장, 전주 남부야시장, 목포 남진야시장 등이 개장했고, 다른 지자체들도 속속 준비 중이다. 올해 기준 전국 야시장은 모두 20여 곳에 이른다고 한다. 가히 '야시장 열풍'이다.

문제는 서문시장 야시장도 호암 동상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취재 결과, 현재까지는 '먹을거리 위주'라는 전국 야시장과 비슷한 운영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수준이어서다. 단지 먹을거리만으로 찾아오는 야시장을 차별화할 수 있을까. 다른 야시장과 다른 대구만의 야시장 스토리는 무엇으로 만들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대구의 역사와 함께하는 서문시장을 상징하는 스토리를 연계하지 않는다면 관광명소로 자리 잡기가 힘들 것"이라는 한 전문가의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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