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벌 없는 사회' 18년 만에 자진해산
사회병리 악순환 중심엔 학벌 여전해
연고주의 통한 소수 금수저 사회 깨야
학력·실력만으로도 대우 받을 수 있어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인지 사회병리적 현상에 대한 '면역사회'가 된 것처럼 보인다. 그 어떤 사건이 터져도 우리 국민들은 웬만해선 놀라지 않는다. 설령 국가적 사건이라고 화들짝 놀랐다 하더라도, 우린 쉽게 잊는 경향이 있다. 다음 사건이 이미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건은 기존의 패러다임으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기 때문에 철저한 원인 분석을 통해 사회를 미래지향적으로 개혁할 때 비로소 '사건'이 된다. 이런 사회적 해명과 치유의 과정을 동반하지 않으면 사건은, 아무리 충격적이라고 할지라도, 반복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는 '사고'가 된다. 이렇게 대한민국은 충격 면역사회가 되었다.
지금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법조 비리 사건도 사고가 될 개연성이 커 보인다. 천문학적인 수임료도 국민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 같다. 법치국가의 근간을 흔드는 이러한 비리가 소위 말하는 전관예우에서 비롯한다는 사실도 국민을 더 이상 충격으로 몰아넣지 않는 것 같다. 전관예우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사회관계를 통해 권력을 획득하고 동시에 이러한 권력이 자기들만의 폐쇄적 권력관계를 만들어내는 연고주의의 늪에 빠진 지 오래이다. 우리 사회가 어떻게 하면 이 수렁으로부터 벗어나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을까?
그런데 사건이라면 사건이랄 수 있는 하나의 단편 소식이 이러한 꿈조차 꾸지 못하게 한다. 1998년 출범해 18년 동안 서울대 해체, 대학 평준화 등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우리 사회의 핵심적 문제를 비판적으로 지적해 왔던 '학벌 없는 사회'가 지난달 25일 자진 해산하였다. 이 단체는 우리가 여전히 학벌사회에 살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학벌은 더 이상 권력 획득의 주요 기제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고 전제하면서 자본의 독점이 더 지배적이어서 활동을 접을 수밖에 없다고 토로하였다. 한마디로 연고주의에 토대를 둔 학벌사회에 백기 투항한 셈이다.
여기서 우리는 학벌 없는 사회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학벌은 단순한 학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고등학교 졸업생의 대다수가 대학을 가는 상황에서 대학 학력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학벌은 동문끼리 밀어주고 끌어주는 연고주의를 통해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학력관계이다. 권력을 창출하지 않는 한 어느 대학, 어느 학과를 나왔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이렇게 학벌은 명문과 비명문, 서울과 지방대학을 서열화함으로써 스스로를 폐쇄적 권력관계로 만들어간다. 개천에서 용 났던 사회가 '학력사회'라면, 자본 및 권력과 결합한 학력만이 힘을 발휘하기 때문에 이 속담이 무의미해진 사회가 '학벌사회'다.
자본 권력과 학벌의 공생 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 강화된 지금 시민단체 '학벌 없는 사회'의 자진 해산은 역설이다. 서울대 신입생의 출신 계층을 살펴보라. 자본 없이 오늘날 영향력 있는 학력을 취득할 수 있는가? 우리 사회에 커다란 힘을 발휘하는 권력 계급의 구성을 들여다보라. 학벌 없이 자본과 권력을 획득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 물음에 무력하게 '아니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차별화된 학력은 권력을 가져오고, 권력은 학벌이라는 네트워크를 통해 자본을 생산한다. 이러한 사회병리적 악순환의 중심에는 여전히 학벌이 자리 잡고 있다.
물론, 자본의 위력이 강화될수록 학벌이라 불릴 수 있는 관계는 점점 더 줄어들어 폐쇄적인 소수 그룹으로 집중된다. 이렇게 학벌사회는 자본이 지배하는 새로운 신분사회를 만들어 흙수저, 은수저, 금수저로 사회를 분열시킨다. 아무리 노력해도 학력과 실력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흙수저론으로 표현되었다면, 학벌 없는 사회를 꿈꿔왔던 이 시민단체의 해산이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자본의 힘이 가속화되고 또 소수의 학벌에 집중될수록 대학을 서열화하는 학벌사회의 구조를 깨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학벌과 권력의 공생 관계를 끊어 놓을 때만 비로소 학력과 실력만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건강한 사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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