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우리는 과연 '시민'이었나?

입력 2016-04-14 01:19:50

제20대 총선이 끝났다. 당선자들은 유권자들의 '현명한 선택'에 감사하며 환호성을 질렀고, 안타깝게 낙선한 후보들은 끝 모를 심연으로 빠져드는 충격과 낭패감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국민들도 자신이 지지하거나 선택한 후보의 당락에 따라 희비를 엇갈려 한다. 그런데 솔직히 각 후보와 특별한 관계(!)에 있지 않은 평범한 국민이라면, 누가 당선되고 낙선한다고 해서 일상의 삶이 별로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유권자와 국민은 한국 '현실' 정치의 들러리일 뿐, 헌법에서 말한 '주권자'는 아니라는 말이다. 듣기 거북하지만 우리의 현실이 그렇고, 특히 TK(대구경북) 주민들은 더더욱 장기판 졸(卒) 취급을 받은 것이 이번 총선이었다는 생각이다.

아니, 여당의 국회의원 후보들이 마치 장기판 졸(卒)처럼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위에서 내려오는 하명에 따라) 적당한 곳에 처박히는 판이니 일반 국민이나 유권자들은 '졸(卒)보다 못한 존재'라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인지도 모른다. 유권자들의 알권리를 위해 후보 자신이 더 적극적이어야 할 방송토론 출연을 오히려 거부한 후보자도 있었다. '한국의 현실 정치에서 유권자를 존중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이 그들의 속내이자 진심이 아닐까. 잘못했다고 무릎을 꿇기는 했는데, 무엇을 잘못했고,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이야기도 제대로 없었다. 무작정 "표를 달라"고 호소하고, 또 "(각자의 선택에 따라) 표를 주었다"고 하면 지나친 폄하일까.

이쯤 되면 '민주주의'라는 제도에 회의가 생길 만도 하다. 플라톤은 정부 형태를 논하면서 철인정치가 첫 번째고, 금권정치가 두 번째이며, 과두정치에 이어, 민주정치는 네 번째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독재자가 지배하는 참주정치보다 민주주의가 나을 뿐, 민주주의는 그리 좋은 정부 형태가 아니라고 플라톤은 생각했다. 늘 변화하는 (민주주의의) 특성 때문에 (민주주의는) 불안정하고 취약하며, 어떤 민주주의 체제도 오랫동안 효과적으로 유지되기 힘든 탓이다. 민주주의의 모범국가라고 하는 미국에서 최근 도널드 트럼프라는 '막장' 인물이 공화당의 유력한 대선 후보로 떠오르고 있는 것을 보면, 민주주의의 이런 부정적 특성은 보다 분명해진다.

1787년 새로운 미국 헌법 작성을 마치고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을 나오는 벤저민 프랭클린에게 누군가 물었다. "어떻게 되었나요? 공화국인가? 왕국인가?" 이때 프랭클린의 답변은 민주주의의 명언 가운데 하나로 여전히 남아 있다. "공화국! (우리가) 지킬 수 있다면."

윈스턴 처칠도 2차 세계대전 중인 1947년 11월 11일 영국 하원 연설에서 "민주주의는 최악의 정치체제이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단서가 있었다. "사람들이 지금까지 시도했던 다른 모든 정치체제를 제외한다면 말이다"는 것이 단서였다.

그럼 '지키기 어렵지만, 그래도 인류가 만든 최고의 정치제도인 민주주의'를 이 땅에서 꽃피울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 '시민'(citizen)이란 개념은 이래서 중요하다. 19세기부터 쓰이기 시작한 '시민'은, 단순히 도시나 마을 공동체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공동체에 대한 권리와 책임을 함께 누리고 갖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한국의 정치 현실에서 진정한 '시민권'은 단순히 일정한 연령에 달한 국민에게 '그냥' 주어지는 형식적 권리가 아니라, 노력하고 투쟁해서 권력자로부터 쟁취해야 하는 '취득권'이다. 신체 조건은 게르만족에게 밀리고, 기술은 에트루리아인보다 못하며, 경제력은 페니키아에 뒤처졌던 로마가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의 시민권이 '의지'와 '노력'으로 얻은 '취득권'이었던 덕분이다. 혹시 이번 선거에서 그냥 투표권을 행사했다면, 다가올 선거에서는 투표권이 아닌 '시민권'을 행사함으로써 이 땅의 민주주의를 바로 세울 수 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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