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참여마당] 수필: 동주님께

입력 2016-04-13 16:24:50

# 동주님께

지금 내 손에는 복각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가 들려 있습니다. 아무래도 아주 천천히 책장을 넘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가슴이 뛰어서고 행여 그대의 시혼을 놓칠까 두려워서고 어느덧 시력이 따라주지 않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더 솔직하게 말씀을 드리면 무지한 내가 읽기에 너무 어려운 한자가 많이 섞여 있어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급하게 서둘러 읽어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시의 행간에서 가늠할 수 없는 그대 절망이 함축된 숨결을 찬찬히 느껴보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혹시 당신도 아시나요? 그대의 이름으로 영화가 만들어진 거 말이에요. 뚜껑을 열기 전부터 세간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정말 고무적인 일이지요. '동주'를 기획하고 연출한 이준익 감독은 인터뷰에서 미안함 때문에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더군요. 나는 미안함 더하기 그리움 때문에 개봉을 기다렸다고 해두렵니다.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는 모릅니다. 막연히 그대가 내 마음에 들어와 오도 가도 않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그대는 알 턱이 없는 일이고 그러니 아무런 책임도 없습니다. 그냥 제 마음이랍니다. 도무지 시가 되지 않아 잠 못 이루는 밤엔 쉽게 쓰이는 시를 부끄러워했던 그대를 철없이 부러워할 뿐입니다. 무연한 마음으로 캄캄한 허공을 올려다보면 거기에 별을 헤는 청년이 있습니다. 미래를 꿈꾸기도 벅찬 시절에 하릴없이 별이나 헤야 했던 그 청년이 가여워서 한참을 따라 헤다가 잠들곤 합니다.

지난해 봄이었던 거 같아요. 우연한 기회로 '쎄시봉' 콘서트에 다녀왔습니다. 김세환, 윤형주, 조영남, 그리고 이상벽 씨가 출연을 했었어요. 소싯적에 좋아했던 김세환 씨를 오랜만에 뵈니 무척 반갑더군요. 노래도 노래지만 다들 재담이 대단하더라고요. 많은 얘기들 중에서 가장 몰입해 들었던 부분은 윤형주 씨가 전한 윤동주, 바로 그대의 죽음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6촌 관계라고 했습니다. 당신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의 숙부가 후쿠오카 형무소로 찾아갔대요. 피골이 상접한 주검을 보고는 차마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둘둘 말아서 현해탄을 건너고, 기차를 타고, 고향에다 묻었다고 했습니다. 사인(死因)이 바닷물을 주사한 것이라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끔찍한 말을 들었습니다. 내 귀를 의심하면서 분개조차 할 수 없을 때 그대의 생가와 묘소가 주마등처럼 스쳤습니다.

사실 그대의 발자취를 찾아보고자 했던 나의 노력은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마 2007년일 거예요. 중국으로 기행을 갔었습니다. 그때 용정땅, 그대의 생가를 돌아보는 기회를 얻었지요. 인솔하신 선생님이 일정을 그리 잡아준 배려 덕분에요. 고딕체로 새겨진 '윤동주 생가'라는 표지석이 쓸쓸하게 반겨주더군요. 좁다란 마루에 걸터앉아 그대 시심이라도 느껴보려고 나는 몇 컷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이동하여 간 곳이 산비탈에 마련된 공동묘지였습니다. 일행들 발밑으로 황토먼지가 풀풀 거리는 4월의 오름길은 등줄기에 땀이 흐를 정도로 경사지더군요. 빗돌은커녕 떼도 엉성한 그대의 봉분 위로 잡풀이 돋아 있었고 중키의 벚나무 한 그루가 그대 소유의 전부였습니다. 피어보지도 못한 채 떠난 그대를 반추하듯이 여드름 같은 꽃망울들만 조롱조롱 맺혀 있었습니다. 마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만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당신의 운명인 양 상상 외로 초라한 유택이었습니다. 무시무시한 절망과 고독 속에서 죽었지만 무사히 돌아와 고향에 묻혔으니 그나마도 다행이라고 여기는 내가 돌연 미워졌습니다.

다시 영화 이야기나 해볼까요? 개봉 첫날, 상영 첫 시간에 맞춰 한달음에 달려갔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리운 그대를 만나기 위해서 남편과 함께 갔습니다. 그이는 내 오래된 그리움에 대해 질투를 몰라서 다행입니다. 하지만 너무 질투를 안 하는 것이 오히려 서운할 때도 있습니다.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하기는 하는가 싶어서 말이지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괜한 트집인 거 안답니다. 필름이 돌아가는 긴박한 사이사이 차분한 목소리로 그대가 시를 들려주더군요. 참, 그대 역할은 '강하늘'이란 배우가 맡아서 열연을 펼쳤습니다. 주옥같은 시편들을 듣노라니 마치 오래된 고백처럼 사무치지 않겠어요? 알 수 없는 생채기가 되살아나는 울분을 감당하기 버거워서 간간이 훌쩍거리고 말았습니다. 나라 뺏긴 설움에 젖은 한 남자의 자세와 표정이 시(詩)라는 옷을 입고 초연히 나를 위로하더군요. 그래도 자꾸만 눈시울이 묵직해져 눈을 감고 시흥에 젖는데 찢긴 희망과 얼룩진 고뇌가 그렁그렁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대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해서 미안하고 또 미안했습니다. '쳐죽일 놈들.' 속으로 이를 갈며 상영관을 빠져나왔습니다. 극장 직원이 영화 어땠냐고 묻더라고요. 좋았다고 했더니 손바닥을 펴보이며 별점을 물었습니다.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다섯 손가락을 들어 만점을 표시했습니다.

'자화상'이라는 시에서처럼 지금도 그대의 고향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까? 이곳은 새봄이 와서 온갖 꽃들의 축제가 한창입니다. 겨우내 움츠린 채 자기 색깔을 감추었던 사람들도 꽃처럼 잎처럼 생기가 넘쳐흐릅니다. 나는 또 나보다 한참 젊은, 우수에 잠긴 한 사나이를 안타까워하며 봄을 보내겠지요. 생각하면 아프고 속상하고 화나면서도 그대를 그렇게 만든 자들에 대해 대놓고 욕 한마디 퍼부을 깜냥도 못 돼서 그저 고픈 배나 채우며 살고 있습니다. 암만해도 나는 쉽게 쓰이는 시를 부끄러워했던 그대 시늉이나 내면서 그냥저냥 순하게 늙어갈 모양입니다. 이 밤도 깊어가는군요. 못다 넘긴 책장은 내일을 기약하며 덮어두렵니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했던 동주님, 그럼 편안히 계세요.

김채영(대구 북구 태전로)

※ 우리가족 이야기, 나의 결혼 이야기, 어머니(아버지), 기행문, 추억의 사진, 독후감, 나의 글솜씨(수필·시·시조·일기 등)를 보내 주세요. 선정되신 분께는 소정의 상품을 보내 드립니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