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체는 보입니다. 행사장에서 몇 번 만났지요."
갑자기 아득해졌다. 왜 처음 뵙는다고 인사를 했을까. 어느 어두운 골목길에서 마주쳤었노라고 얘기했어도 훤히 꿰고 있었을 것 같았다. 대구시각장애인문화원 정연원(72) 원장은 앞에 있는 형체만을 볼 수 있다고 했으나 상대 마음까지 읽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 씨는 경희대 작곡과를 졸업했다. 음악 공부를 시작할 때 '광대'는 안 된다며 할머니의 반대가 심했으나 아버지만은 예악(禮樂)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정 씨를 변호하고 밀어주었다. 정 씨는 경북예술고등학교와 신일전문대(현 수성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정 씨는 2000년 10월 18일을 잊을 수 없다고 회고했다. 집에 화재가 나서 아내는 숨졌고, 정 씨는 사투 끝에 깨어났으나 시력을 잃었다. 아내의 빈자리가 너무 컸고, 그 역시 시력 장애의 수용과 적응이 너무 힘들어 죽을 결심을 수도 없이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방해꾼'들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춥고 답답해 눈을 떴습니다. 낯선 곳인데 말이 나오지 않고 움직일 수도 없었습니다. 휠체어에 태워져 간 곳이 병원 영안실이었습니다. 제가 깨어나지 않아 아내의 입관이 늦어졌다고 하더군요. 떠나지 말라고, 잡아보지도 못하고 '잘 가'란 말 한마디 없이 멍청하게 아내를 떠나보냈습니다."
정 씨는 어느 새벽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듣고 있다가 갑자기 몸이 붕붕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이어진 곡은 베토벤 교향곡 제5번이었는데, 소위 '운명은 문을 두드린다'는 부분에서 강력한 힘이 용솟음치기 시작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정 씨는 종일 클래식 FM 라디오를 들으며 지팡이에 의지해서 걷기 시작했다.
"시력과 몸이 조금 안정되자 지하철 타기에 도전했습니다. 넘어지고 욕먹고 헤매면서 점차 뻔뻔해지기 시작했지요. 무릎과 정강이뼈의 상처는 홀로서기의 훈장이 되었고 무릎 부분을 짜깁기한 바지는 무릎 보호대가 되었습니다."
정 씨는 2014년 10월 대구시각장애인문화원(www.blindlove.org, cafe.daum.net/tgbc) 제2대 원장으로 취임했다. 문화원에서는 시민들과 시각장애인이 함께 누리는 문화의 장을 만들고 있다. 도서 낭독, 인문학, 한문, 영화, 클래식 감상, 역사기행 등을 한다. 시각장애 1급인 정 씨 역시 하루에 두 권의 책을 귀로 읽는데, 항상 CD플레이어에 이어폰을 꽂고 다닌다.
"우리 사회의 시각장애인들은 문화를 제대로 향유하지 못한 채 소외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장애의 특성에 맞게 사회 일반의 문화 내용에 약간의 첨가작업만 한다면 장애인들도 문화생활의 소외에서 벗어나 건강한 시민으로 다시 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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