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창의 에세이 산책] 난민 싫어요, 시민 할래요

입력 2016-03-28 19:20:12

"샘, 어른들은 정말 우리가 얼마나 힘든지 너무 몰라요. 대학 들어가는 순간 빚쟁이가 되고 그 굴레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한다는 걸 어떻게 알겠어요? 가난한 부모 만나 학자금 대출받는 순간 경제노예가 되는 거죠. 휴학하고 알바하고 온갖 방법을 써 봐도 소용없어요. 우린 시민 아니에요. 난민이에요."

시민을 난민으로 몰아가는 세상에서 청년들만 유독 힘든 걸까? 한평생 자녀 부양에 몸바치고 만신창이가 되어 부채만 짊어진 노인 빚쟁이들은 또 어찌할까나? 쪼들리고 삭신은 쑤시고 외롭기까지 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고독사가 늘어간다고 하지 않나.

"삼십 년 일해서 모은 거라곤 달랑 아파트 한 채, 어떻게 인생 이모작을 준비해야 할지 막막해요. 잘 늙는다는 게 이렇게 힘드네요." 퇴직금으로 이자 받아 살아갈 수 없는 세상에서 중년들의 한숨은 청년 못지않다. 이제 어깨 펴고 느긋하게 살아가야 할 나이가 아닌가, 하지만 웬걸, 삶은 더 팍팍하고 길은 멀다.

이렇게 난민이 되어가는 아우성 속에도 시민들의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이들이 있으니, 이름하여 '정치인'. 설국열차 맨 앞칸에 타고 앉아, 사는 게 뭐가 어렵냐고 속으로 헤헤거리는 이들이다. 힘든 서민들을 위해 일하겠다고 열변을 토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생각한다. '난 종자가 달라.'

정치인들이 다 그렇다고 폄하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젊은이들이 왜 그렇게 힘들어하고 노인들이 왜 그렇게 아파하고 중년들이 왜 그렇게 한숨짓는지 도무지 모른다. 오히려 이런 세상 만들어 놓고 자랑하고 떠벌리며 잘난 체한다. 애초부터 다른 칸에 탔으니까 같은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 걸까?

설국열차가 낭떠러지로 떨어지기 전에 '나는 시민이 되고 싶어요. 난민 싫어요' 하는 절규를 귀담아들었으면, '내 자식은 멀리 보냈으니 걱정 없고, 꼬불쳐 둔 돈도 꽤 되니 뭐가 힘들어' 하는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선거운동하기 전 깊이 반성하시길.

난민 되기를 거부하고 죽었다가 살아난 청년을 기념하는 예배와 미사를 지난주 모든 교회와 성당에서 드렸다. 부활이 뭘까? 그 시대의 절망과 죽음을 이겨 낸 사건이 지금도 우리 속에 살아 있다는 것 아닐까? 그래서 난민 되기를 거부하는 이들은 오늘도 이렇게 기도한다.

'매일 죽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입니다. 매일 부활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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