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책의 새論새評] 살생부 뒤에 숨은 자

입력 2016-03-02 20:17:53

전원책 칼럼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제2회 백만원고료 한국문학 신인상. 전 경희대 법대 겸임교수. 전 자유경제원 원장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제2회 백만원고료 한국문학 신인상. 전 경희대 법대 겸임교수. 전 자유경제원 원장

18·19대 총선 이어 또 살생부 등장

당대표 사과로 학살 명단 파동 일단락

살생부로 인해 죽게 된 것은 현재 권력

그 뒤에 숨은 자가 朴정부의 진짜 적

처음 김무성 대표가 상향식 공천을 천명할 때만 하더라도 이제 '당내(黨內) 민주주의'를 시도할 때도 됐다고 생각했다. 상향식 공천은 대중민주주의의 전제 조건 같은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러기엔 아직 준비가 안 됐다. 자발적 당원보다는 당협위원장이 조직적으로 모집한 당원이 대부분이니, 말이 상향식이지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래서 오픈 프라이머리를 하자면서 100% 여론조사 방법이 제시됐다. 아마도 이 꾀를 낸 자는 여론조사가 대단히 공정하고 정확하며 과학적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여론조사는 표본의 의견을 전체의 의견으로 추정한 것에 불과하다. 전 세계에 여론조사만으로 국회의원 후보를 결정하는 나라는 없다.

2라운드,'진박 마케팅'이 점화됐다. 상향식으로 한다고 하니 그전에 '누굴 쳐내야 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실세 최경환 의원이 복귀하면서 '박근혜정부의 성공을 위해서 진실한 사람이 필요하다'는 논지(論旨)가 확산됐다. 차라리 당 노선에 맞지 않는 사람은 내치자는 주장이 훨씬 더 먹혔을 텐데 그런 말은 없었다. 하긴 총선 뒤의 레임덕을 생각하면 '믿어도 되는 진박'들이 간절했을 것이다. 그래선지 잠시 역풍이 불자 아무래도 박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할 것 같다는 말까지 나왔다. 놀라운 건 이런 비민주적 주장을 하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아직도 국회의원을 거수기 정도로 보는 것은 아닐까?

3라운드는 공천관리위원회(공관위)였다. 처음 공관위는 공천 과정을 관리할 뿐이지 심사하는 곳이 아니라고 시침을 뚝 뗐다. 그래도 위원장 자리를 놓고 실랑이가 벌어졌다. 결과는 '친박'의 완벽한 승리였다. 위원장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이한구 의원이 차지했고, 위원들도 당 대표의 몫은 없었다.

그런데 이 공관위가 느닷없이 후보 심사에 나섰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공관위원들에게 국회의원은 물론 당원이 뽑은 당 대표와 의원들이 뽑은 원내대표까지 국회의원을 할 자격이 있는지 심사를 받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도대체 누가 그들에게 입법부를 구성할 권리를 준 것인가? 이런 풍경 역시 전 세계 문명국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4라운드. 마침내 '살생부'(殺生簿)가 등장했다. 18대 총선 '친박 학살' 때, 그리고 19대 '친이 학살' 때 등장했던 살생부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만약에 이게 사실이라면 이번에는 아마 '비박 학살'일 것이다. 하긴 공관위원장부터 '월급쟁이 국회의원'이니 하는 말을 공개리에 하지 않았던가? 그런 말들은 '가슴에 품은 살생부'가 아니란 말인가? 선거판의 살생부는 화력 강한 불이다. 불은 공관위원장이 붙였다. "자체 조사해보니 상황이 심각하다고 판단해 당의 공식기구에서 철저하게 조사해줄 것을 요청한다"면서 "3김시대 음모 정치의 곰팡이 냄새가 난다"고 말했다. 누가 보더라도 YS에게서 정치를 배운 김 대표가 타깃이었다.

하긴 파동의 발단인 정두언 의원은 김 대표에게 직접 살생부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코너에 몰린 김 대표는 "누구로부터도 어떤 형태로든 공천 관련 문건을 받은 적도 없고 말을 들은 적도 없다"고 부인했다. 결국 의원 총회가 열리고 대질신문 비슷한 게 벌어지고 난 뒤에야 이 파동을 덮었다. 김무성 대표는 "국민과 당원에게 심려를 끼친 점에 대해 사과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자, 누가 이긴 것일까? 우선 공관위든 그 뒤에 있는 누구든 이제 살생부에 거론된 자를 쳐내기는 힘들게 됐다. 그렇다고 명단에 오른 자들이 승자도 아니다.

만약에 살생부가 누구 가슴에라도 있는 것이라면, 그래서 누군가를 꼭 '죽여야' 한다면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김 대표도 패자(敗者)는 아니다. 그는 잠시 논란의 중심에 섰지만 어쨌든 당 대표이고 이번 총선을 주도해 승리로 이끌 유일한 인물이다. 지금 누가 김무성을 대신할 것인가?

그런데 진짜 기가 막힌 건 이 파동의 진짜 배후가 자신이 패자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단언컨대 살생부로 인해 죽게 된 것은 '현재의 권력'이다. 누가 자꾸 권력을 팔아 자신의 입신(立身)을 꾀하는가? 살생부 뒤에 숨은 그자가 박근혜정부를 방해하는 진짜 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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