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리도 못난 아들-제1회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우수상

입력 2016-03-02 16:39:18

해는 아직 중천에서 조금 기울었는데 어머니는 벌써부터 하늘을 쳐다봅니다. 땅거미가 짙어지면 어머니는 마루를 서성거립니다. 그리고 마루 서쪽 벽에 걸린 괘종시계에 자꾸자꾸 눈이 갑니다. TV를 켜보지만, 눈은 TV에 가 있어도 귀는 대문 밖에 가 있습니다.

며느리도 보고 손녀를 둘이나 본 늙은 아들인데도 어머니에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아들입니다. 아침밥 같이 먹고 출근한 아들인데, 출근한 지 10시간도 채 안 되었는데. 그래도 기다려집니다. 하루해가 길기만 합니다. 아들이 현관문을 밀고 들어오면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저녁을 먹고 아들은 아들 방에, 어머니는 어머니 방에 갑니다. TV를 켜놓고 멍하니 앉아있는 어머니 방에 아들이 들어옵니다. 어머니는 좋아서 어쩔 줄 모릅니다. 벽에 기대어 비스듬히 앉아 있는 어머니의 약한 다리를 늙은 아들이 베개 삼아 베고 눕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편안하고 행복한 순간이지만, 아들은 모릅니다. 그냥 한없이 푸근하고 편안하기는 합니다.

어머니는 신이 납니다. 그냥 이야기가 줄줄 나옵니다. 노인정에서 화투 쳐서 딴 돈(10원짜리 동전)을 전부 돌려준 이야기며, 외할아버지께서 하도 힘이 좋아서 근처 사람들이 '차 장군'이라 불렀던 이야기, 그 외할아버지가 총 맞고 달아나는 산돼지를 도끼 머리로 때렸다가 떠받혀서 '휭' 날아올라 산머루 넝쿨 위에 떨어져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 처녀 시절 무극도 포교하러 온 큰아버지가 하도 인물이 출중해서 큰아버지께서 오실 때마다 인물 좋은 사람 왔다고 좋아했다던 이야기. 그 큰아버지께서 스물한 살 당신 동생과 십팔 세 어머니를 중매 서서 성사시킨 이야기며, 첫 신행 왔을 때 이웃사람들이 막내며느리 잘 봤다고 칭찬하던 이야기.

당신 시아버지께서 아무도 주지 않던 대추를 내어주시자 우리 할머니께서 "막내며느리가 좋기는 좋은갑다"라고 하시던 이야기. 음지마을 덤 밑에 있는 눈동자가 노란 갈방실댁 오두막집 상방에 신혼 첫 살림을 살면서 할머니 비위 맞추던 이야기, 힘들여 군불을 지펴드린 후 다음날 아침에 방이 "뜨스디껴"라고 인사를 하면, 고맙다는 말 한 번도 못 들어 보고 항상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따따무리 하두마"라고 했다던 이야기며, 새신랑 새신부가 청송 넉우 산골 독가촌에 살던 이야기, 옹가지물에 빠져 죽은 병아리를 아버지 모르게 거름더미에 파묻었다가 아버지께서 저희끼리 먹이를 파먹다가 묻혀 죽은 줄로 속아 넘어가시는 것을 보고서야 가슴 쓸어내린 이야기, 상주(喪主, 큰아버지)가 "아이고~ 아이고~" 하고 곡을 하다가 국이 잘 안 끓는다고 하자 "아따, 그 솥 밑바닥 대패로 좀 밀어 버려라" 하시는 바람에 새색시인 어머니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는 이야기.

어린 내가 연 꼬리를 붙이다가 아버지가 골목에 들어오시는 소리가 들리자 연 꼬리를 질질 끌며 뒤꼍으로 도망치던 이야기, 또 생쌀 먹다가 아버지가 돌아오시자 불이 나게 뒤꼍에 가서 베틀 밑에 뱉어버리고 오던 이야기, 이웃집 용식이 형이 먹다 버린 송구 막대기를 내가 주워서 빨아먹는 것을 보신 후로는 아버지께서 나뭇짐 위에 늘 송구를 끼워 오셔서 나를 주셨다는 이야기, 내가 소풍 갈 때 아버지께서 돈 200환 쥐여주고 쓰지 말고 가지고 오라고 하셨다는 이야기, 내가 군대에 가고 어린 동생들과 고생한 이야기 등.

어머니의 이야기는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처음 몇 마디만 형식적으로 주고받을 뿐 늘 하시던 그런 이야기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냥 TV만 봅니다. 그러다가 아들은 잠이 듭니다.

어머니는 잠든 아들이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어머니는 편하게 눕지도 못합니다. 다 늙은 아들 잠이라도 깨울세라 아들에게 다리를 내어준 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그렇게 앉아 있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좋기만 합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들이 일어납니다. 좌우를 두리번거리면서, "아~ 잘 잤다. 몇 시로"라고 합니다. 어머니는 잠깬 아들과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습니다. 어머니가 말합니다.

"인제 열 시 반밖에 안 됐다."

아들이 큰소리로 말합니다. "아~ 벌써 그렇게 됐나. 이제 그만 자시더."

어머니는 많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그래, 인제 그만 가서 자거라"라고.

아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무슨 책임이라도 다했다는 듯, 그냥 아들 방에 돌아가 버립니다. 평소에 자주 부르던 노랫가락을 오늘은 한 곡조도 안 부르고 가버립니다. 아들은 방에 들어가서 방문을 굳게 닫습니다. 마누라의 눈치를 슬쩍 살핍니다. 그리고 금방 쿨쿨 잘도 잡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닫은 방문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어머니도 비로소 방문을 닫고, 방바닥에 등을 붙이고 눕습니다. 그러나 좀처럼 잠은 오지 않습니다. 한편 좋기도 하고, 뭔가 허전하기도 하고.

또다시 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그래서 아침엔 꼭 한 말씀 하십니다. "야들아, 밤이 왜 그리 기노? 청기와 집을 몇 채나 지었는지 모른다" 혹은 "청기와 집을 열두 채도 더 지었다."

어머니께서 평생을 같이 살아주실 분도 아닌데, 5년도 아니 3년도 더 못 사실 분인데, 아들은 모릅니다. 나중에 얼마나 후회하고, 얼마나 많은 통한의 눈물을 흘려야 할지 못난 아들은 모릅니다.

60년을 같이 살면서 하룻밤도 단 하룻밤도 어머니와 함께 밤을 지새우며, 어머니의 그 많은 이야기를 성심껏 새겨들으며 같이 웃고 맞장구쳐 주지 못한 채, 어머니에게 그런 기쁨, 그런 행복을 단 하룻밤도 안겨드리지 못한 채 못난 아들은, 정말 지지리도 못난 아들은 그렇게 어머니를 영원히 보내드리고 맙니다.

한번 떠나신 어머니는 너 이놈 보란 듯 다시는 나타나시질 않습니다. '아~ 단 하루라도, 단 한 번만이라도 다시 와 주신다면 내 다리에 어머니를 누이고 어머니의 그 많은 이야기 밤새워 들어드리고, 맞장구도 쳐드리고, 그래 봤으면 한 번만 그래 봤으면 이 한 풀리련만.'

지지리도 못나고 불효막심한 아들은 오늘도 이렇게 그냥 멍하니 먼 산을 바라보면서 뜨거운 눈물을 삼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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