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팔길이 원칙

입력 2016-02-21 15:23:43

1996년 9월 13일 저녁 부산 수영만 요트경기장에 가로 33m, 세로 18.5m의 초대형 스크린이 세워지고 영화 '비밀과 거짓말' 상영이 시작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영화제인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의 막이 오르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문화 불모지 부산에서 갖은 우려와 우여곡절 속에 탄생한 영화제는 20년이 흐른 지금 아시아 대표 영화제로 자리매김했고, '영화 창의도시 부산'의 밑바탕이 되었다.

이용관, 전양준, 김지석, 박광수, 오석근 등 젊은 영화인들이 의기투합하고 문화부 차관과 영화진흥공사 사장을 역임한 김동호가 집행위원장을, 당시 부산시장이던 문정수가 조직위원장을 각각 맡았다. 영화제는 처음부터 집행위원장이 작품 선정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시장 또한 "부산시는 재정 지원만 할 뿐 프로그램 선정 등 영화제 실제 운영은 전적으로 영화인들이 맡아서 할 것"이라 강조했다고 한다. 이렇듯 부산국제영화제의 성공은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팔길이 원칙이 잘 지켜졌기 때문에 가능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최근 부산시의 행보를 보면 이 원칙이 심각하게 무너지고 있다. 2014년 제19회 영화제 때 세월호 참사를 다룬 영화 '다이빙벨' 상영으로 영화제와 마찰을 빚기 시작한 부산시는 지원금 삭감, 이용관 집행위원장 사퇴 압박, 이 집행위원장과 전'현직 사무국장 검찰 고발에 이어 결국에는 2월에 임기가 만료되는 이 집행위원장을 재위촉하지 않을 뜻을 분명히 밝혔다.

베를린국제영화제를 비롯한 세계 유수 영화제와 국내외 영화기관단체, 영화인들의 부산국제영화제와 이 집행위원장에 대한 지지 시위와 성명이 끊이지 않고 있는 지금 전격적으로 행해진 부산시의 결정에 부산국제영화제의 앞날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형국이 되어 버렸다. 설령 강수연 공동집행위원장을 비롯한 집행위원 전원이 사퇴한다거나 차라리 영화제를 제3의 도시로 이전하겠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그들을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사태의 책임은 전적으로 부산시에 있기 때문이다. 여론이 거세지자 부산시도 이를 의식한 듯 서병수 부산시장 또한 영화제 조직위원장을 동반 사퇴하고 영화제를 민간에 넘겨 영화제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하겠다고 하는데, 이 또한 두고 볼 일이다.

공들여 쌓아 올리기는 어려워도 허물어지는 건 한순간이다. 문화예술에 관이 개입하고 자율성과 독립성을 침해하기 시작하면 더 이상 문화예술의 미래는 없다. '공연문화 중심도시'를 표방하고 있는 대구는 반드시 부산시와 부산국제영화제를 반면교사 삼아 행여나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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