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이경희 선생 묘소를 애국지사 묘역으로

입력 2016-01-26 00:01:00

대구 북구 무태 동변동 가람봉 산기슭에는 평범한 묘소 한 위(位)가 있다. 흔한 표지석이나 안내판이 없기에 후손이 아니라면 누구의 묘소인지 알 길이 없어 대수롭지 않게 지나칠 것이다. 하지만 이 묘소가 바로 대구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인 지오(池吾) 이경희 선생(1880~1949)의 묘소이다.

지오 선생은 지난 연말 딸인 이단원 여사가 아버지의 유품과 관련자료 700여 점을 대구시에 무상으로 기증하면서 새로 조명받고 있다. 그분의 삶은 곧 조선의 망국과 독립운동, 그리고 해방 후 건국의 역사와 궤적을 같이하고 있다.

대구 무태에서 태어난 고 이경희 선생은 자호(自號)를 '나라 잃은 나는 못난이'라는 뜻의 지오(池吾)로 삼을 정도로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에 인생을 바친 분이다. 경술국치를 전후로 해서는 교육계몽운동에 헌신했고, 이동녕 이회영 김좌진 등과 당시 최대 규모의 항일비밀결사 독립운동단체인 신민회(新民會)의 핵심 멤버로 활동했다. 나라를 잃자 1911년에 많은 가산을 정리하여 서간도로 망명해 학교를 세웠고, 군자금을 만들어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주도하고 무장독립투쟁 단체를 지원했다.

특히 김원봉 주도의 의열단에 가입하여 1923년 조선총독부 폭파를 계획하다 체포되어 모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27년에는 항일단체인 신간회(新幹會) 발족에 참여해 중앙본부 총무간사와 경상북도 지회장을 겸임하였다.

만해 한용운 선생과는 친분이 두터워 가족끼리도 내왕이 잦았다고 한다. 1939년 7월 12일, 만해 선생의 회갑연이 지오 선생을 포함 홍명희, 오세창 등 당대 최고 명망가 16명이 참석한 가운데 비밀리에 열렸다. 즉석에서 한용운 선생도 한시를 짓고 참석자들도 글을 바쳐 서첩 '만해선생수연첩'(萬海先生壽宴帖)을 만들었는데, 몇 해 전 KBS '진품명품'에서 2억원의 높은 가치를 인정받았다. 지오 선생도 만해에게 '모두를 포용한다'는 뜻의 '불택세류'(不擇細流)란 글을 남겼다.

일제강점기 말 끈질긴 창씨개명 요구를 끝내 거부하며 일제 패망 이후를 준비했다. 해방 직후 초대 경상북도 부지사 겸 대구부(府) 부윤(시장)에 위촉되어 약 1년간 공직생활을 지냈고, 이후 1947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총재 이승만, 부총재 김구) 경북도지부장을 맡아 건국에 힘썼다. 이어 1949년 현재 대구경북 대표언론인 매일신문의 전신인 남선경제신문 제4대 사장을 역임했다. 뒤늦은 1980년대 이후에 자손들의 노력으로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아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공로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대구 효목동 망우공원에 그분의 공적비가 유일하게 세워져 있다. 딸 이단원 여사는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나라를 위해 헌신한 것은 마땅히 백성된 양심으로 한 것이니 독립유공이니 뭐니 자랑 같은 것은 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기억했다.

무태 동네 어르신들에 따르면 지오 선생은 독립운동하느라 모진 탄압을 받았기에 직계 가족들이 매우 힘들게 살았으며, 해방 후 초대 대구시장 시절에도 보리죽을 끓여 먹고 끼니를 걱정하며 청빈하게 사셨다고 한다. 선생의 부인은 평생 고생만 하시다가 1979년 사글세 집에서 영양실조로 돌아가셨다. 그분의 친동생 이강희 선생도 대구와 만주 일대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하다 1942년 이역만리 만주에서 짧은 생애를 마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그런데도 지오 선생의 묘소는 지금 대구시민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다. 보훈처와 대구시, 북구청은 이제라도 지오 선생 묘소 근처에 안내판과 공적을 알릴 수 있는 설명판을 제작하고, 대구를 대표하는 애국지사 묘역으로 손색이 없도록 정비해야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망한다'는 명제는 진리이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