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열흘 동안 이스라엘 취재를 다녀왔다. 가정, 교육, 창업, 농업, 대학, 군대 등 이스라엘 전반을 살펴본 소중한 기회였다.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란 말처럼 가서 본 이스라엘은 듣던 것과는 크게 달랐다. 아랍 국가들과의 대치, 팔레스타인과의 분쟁, 테러 위험 속에서도 사회 곳곳에 활력이 넘쳤다. 굉장한 속도로 발전하는 국가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인상적인 곳이 많았지만 그 중 뇌리에 깊이 각인된 곳은 '통곡의 벽'(Wailing Wall)이었다. 예루살렘을 찾은 관광객이면 꼭 들르는 장소다. 엄청난 크기의 돌로 쌓은 웅장한 외관에, 소원을 적은 종이를 벽 틈에 끼워 넣고 기도하면 성취가 잘 된다는 얘기가 있어 항상 관광객들로 붐빈다. 외국인에겐 관광명소 중 하나이지만 이스라엘에 사는 유대인, 그리고 전 세계 유대인들에게 통곡의 벽이 갖는 의미는 매우 각별하다.
통곡의 벽은 서기 70년 로마 티투스 황제 군인들이 파괴한 제2차 유대인 성전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부분이다. 나라를 잃고 2천 년 동안 세계를 방랑한 유대인에게 통곡의 벽은 망국(亡國)의 아픔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나아가 다시는 나라를 잃는 아픈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결의를 새기는 장소이기도 하다.
푸른 군복에 배낭을 메고 총까지 든 이스라엘 신병들이 통곡의 벽 앞에서 나라 사랑 정신을 다지는 모습이 많이 눈에 띄었다. 이스라엘은 신병에게 통곡의 벽을 참배하도록 하고 있다. 13세 혹은 12세에 성년식을 하는 이스라엘 청소년들도 성년식 날 통곡의 벽을 찾는다. 유대인들이 통곡의 벽을 참배하는 것은 하나의 의식(ritual)이라 할 수 있다. 종교적 의식이기도 하지만 나라 잃은 슬픔을 간직한 곳을 찾아 국가관을 정립하고 애국심을 고취하는 의식인 것이다.
우리나라와 이스라엘은 1948년, 같은 해 나라를 세우고 수십 년 만에 경제 발전을 이뤄낸 등 비슷한 점이 많다. 정이 많고 교육에 열정적인 등 민족성도 비슷하다. 그러나 아픈, 어찌 보면 드러내고 싶지 않은 망국을 상징하는 공간을 통해 국민에게 애국심을 고취하는 부분에서는 이스라엘이 우리보다는 몇 수 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스라엘 통곡의 벽과 같은 곳이 우리나라에는 어디일까를 자문(自問)해봤다. 먼저 떠오른 곳이 국립서울현충원이다.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이 잠들어 있는 민족의 성지이며 겨레의 얼이 서려 있는 곳이다. 이렇기에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들은 새해를 맞거나 기념일에 현충원 현충탑을 찾아 참배한다. 새로운 당을 만드는 등 정치적 이벤트가 있을 때에도 현충탑을 찾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현충탑 참배와 같이 이뤄지는 전직 대통령 묘역 참배와 묶이게 되면 예기치 않은 상황이 자주 벌어진다. 어느 대통령 묘역을 참배했다, 안 했다를 두고 보수'진보 양 진영, 또는 같은 진영 간에도 날카롭게 맞서기 때문이다. 전직 대통령 묘역 참배를 둘러싼 다툼이 현충원 참배 의미를 희석시키고, 변질시킨다고 볼 수 있다. 이 모습을 보고 자라는 미래 세대가 뭘 배울지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대한민국의 평화와 번영을 기원하고 국가 수호 결의를 새로이 하는 다짐의 장소가 바로 현충원이다. 현충원에 누운 전직 대통령들은 공(功)과 과(過)를 다 갖고 있다. 전직 대통령 묘역 참배와 맞물려 현충원 참배의 참뜻이 흐려지고, 소모적인 논쟁이 되풀이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또 하나 일제에 의해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투옥돼 고초를 겪거나 목숨까지 잃은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국민적 참배 공간으로 승화하는 방안도 추진해볼 일이다. 나라 잃은 아픔을 간직한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애국심을 북돋우는 공간으로 삼자는 말이다. 아픈 역사를 잊지 않고 가슴에 새겨야만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는 법이다. 국가, 애국이란 단어가 갈수록 옅어지는 우리에게 통곡의 벽은 이런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나라가 망하면 보수'진보도 없다. 그저 망국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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