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책의 새論새評] 국민이 있고 나서 권력이 있다

입력 2016-01-21 00:01:00

전원책 칼럼

1955년 울산 출생.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제2회(1977년) 백만원고료 한국문학신인상. 전 경희대 법대 겸임교수. 전 자유경제원 원장
1955년 울산 출생.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제2회(1977년) 백만원고료 한국문학신인상. 전 경희대 법대 겸임교수. 전 자유경제원 원장

아무런 비전 없이 권력 의지만으로

정권 획득에 급급한 한국정치의 전통

국민은 뒤에 있고 권력이 앞이라는

후진적 민주주의 슬로건 안타까워

원래 슬로건 정치는 후진적 민주주의의 권력이 즐기는 방식이다. 그런데 요즘은 다들 슬로건에 맛을 들였다. 대중은 신문에서 장문의 기사를 읽는 대신 텔레비전에서 축약된 '멘트' 듣는 걸 더 좋아한다. 어떤 문제든 자신에게 직접 연관된 게 아니라면 대중은 그걸 이해하기 위해 조금의 비용도 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 비용이 돈이든 시간이든 말이다.

권력 역시 굳이 대중에게 정책을 설명하고 설득하는 대신에 더 쉬운 길을 찾는다. 대중은 조금만 지루하면 떠나므로, 짧은 시간에 대중에게 어필해야 한다. 그건 강렬하고 선정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정책의 슬로건화'다. 그런데 지금 슬로건을 즐기는 곳은 권력이 아니라 야당이다.

말하자면 완전히 거꾸로다. 대통령이 나서서 노동개혁을 왜 해야 하는지 일일이 설명하지만 야당은 그저 '노동개악'이란 한마디로 받는다. 국회선진화법이라는 '자신이 만든' 이상한 법에 발목이 잡힌 대통령은 엄동설한에 거리에 나가 '천만 서명운동'에 참여하기까지 했다.

솔직히 그보다는 야당을 찾아가 담판해야 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어떻든 대통령은 그런 설득과 토론보다는 '대국민호소'를 택했다. 얼마 전 담화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면서 한숨도 쉬었다.

그런데도 야당은 오불관언(吾不關焉)이다. 답답해진 여당은 국회선진화법을 개정할 '잔꾀'를 냈다. 감히 예언하자면, 야당은 여당에 당하는 모양새를 보이면서 노동개혁 법안 통과를 방치하고 국민이 반발하길 기다릴 것이다. 선거에 이길 최고의 전략은 '약자(弱者) 코스프레'이니 말이다.

청와대도 소통에 젬병이지만, 도대체 우리 야당은 왜 다수(多數)를 끝까지 무시하려 들까? 그 역시 권력욕 때문이다. 이 정부 들어 놀랍게도 제1야당이 벌써 세 번째 바뀌었다. 새정치민주연합을 만든 게 엊그제 같은데 이번에 '더불어민주당'이라는 정당으로 변신했다. 안철수 브랜드인 '새정치'를 떼어내고 대신 '더불어'라는 생경한 단어를 붙인 그 당은 이름에 걸맞게 화장하느라 한참 부산하다. 매일처럼 탈당이 벌어지는 한편으로 때맞춰 새 인물을 영입한다.

솔직히 국민은 '친노 패권주의'가 뭔지, 야당이 왜 쪼개지는지 잘 모른다. 다만 가까이는 공천권을, 멀리는 대권을 두고 벌이는 싸움이란 정도만 알 뿐이다.

그래서 탈당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또 영입인사도 그리 놀랄 만한 인물들이 아니다. 나간 의원은 문재인 대표와 각을 세웠던 이고, 들어온 사람은 대부분 그럴 만한 '정치 지망생'일 뿐이니 말이다. 솔직히 그들 가운데 개인적인 입신양명(立身揚名)이 아닌, 거룩한 투신(投身)은 없다.

사정은 안철수 의원이 뚝딱 만들고 있는 당도 마찬가지다. 반대당이 '왕당파'라면 모르겠지만 대명천지 민주국에서 버젓이 '국민의당'이라는 문패를 건 것도 이상한데 '성찰적 진보'와 '개혁적 보수'를 아우른다는 슬로건을 내거니 역사상 첫 '색깔 없는 정당'이 될 판이다. 여기에 모여든 이들은 문자 그대로 다채롭다. 보수정객도, 그 반대편에 있었던 이도 있다. 그런데 새 정치를 한다는 이들이 낯익은 이들뿐이니 대중이 보기엔 좀 당황스럽다.

그 두 당은 지금 호남을 놓고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벌이는 중이다. 그러니 무슨 노동개혁에 신경 쓸 시간이 있을 것이며, 대안을 가지고 청와대와 토론할 여유가 있겠는가?

단언컨대 지금 '두 야당'의 보스들에겐 오로지 '너 죽고 나 살아야 한다'는 절박한 헤게모니 싸움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제1야당이 되고 나아가 대권을 잡아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국가의 미래에 대한 아무런 고민 없이 잘 포장된 이미지로 권력을 잡은들 그 권력을 어디에 쓰겠는가?

하긴 이것이 우리 전통이다. 문민정부들이 하나같이 실패한 이유는 달리 있는 게 아니다. 지도자가 능력은 물론 아무런 비전도, 열정도 없이 오로지 권력의지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 비극이 반복되는 게 나는 두렵다. 그래서 한마디 하자면, '국민이 있고 나서 권력이 있다'. 당신들이 늘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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