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밤에, 남편은 두만강을 탈 없이 건넜을까." 김동환의 시 '국경의 밤'(1925)의 첫 구절이다. 72절이나 되는 이 긴 시의 키워드는 '사랑'이다. 설을 앞둔 한겨울의 두만강 국경지대, 순이의 남편은 설을 맞을 돈을 마련하기 위해, 위험한 소금 밀수출을 하러 나선다. 바로 그날 밤, 8년 전 신분 차이로 헤어진 꿈에도 못 잊을 첫사랑, '언문을 아는 선비'가 한겨울의 추위를 뚫고 두만강 먼 국경지역까지 순이를 찾아온다. 그 밤 가족을 위해 소금 밀수출을 하러 나갔던 남편은 마적 떼에게 살해당해 시체가 되어 돌아온다.
'국경의 밤'은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도 "당신이 없다면 8년 후도 없고 세상도 없다"면서 변함없이 사랑을 구애하는 '언문을 아는 선비'와 그 사랑의 구애를 거절하는 순이 두 사람 간의 대화가 주를 이루고 있다. 신분 높은 집안 자제로, 서울 학교로 진학해서 멋진 신문물을 경험하고도 오로지 시골 소녀 순이를 염원하며 돌아온 이 멋진 남자의 절절한 사랑을 어떤 여자가 쉽게 거절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순이는 '언문을 아는 선비'의 애절한 구애를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것이 과연 정절을 목숨보다 중요시한 유교 이데올로기 때문이었을까. 순이는 '저녁이면 고기를 끓이며 술을 만들어, 사내와 같이 먹으며 입 맞추며 놀며 지내다가 청산(靑山)을 두고 구름만 가는 아침이면 산령(山嶺)에 올라 꽃도 따고, 풀도 꺾는' 자유로운 삶을 살던 여진족의 후예였다. 이런 순이가 고리타분한 유교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겨울 같은 혹독한 현실 속에서 얻은 삶의 예민한 감각으로 이 남자의 사랑은 '환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이 남자가 순이에게 건넨 '여자는 태양이다'라는 달콤한 말은 당시 유행하던, 일본 최초 신여성 단체 '세이토'의 유명한 선언문 한 구절을 앵무새처럼 반복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남자가 읊조린 페스탈로치나 루소는 1920년대 신청년들이 내용도 모르면서 자기 과시를 위해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었다. 그러니 '사랑'의 마음인들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을까. 삶과 죽음을 오가는 날 선 현실을 살아가는 순이에게 이 남자의 불안정하면서 뿌리 없이 허약한 정신이 아무런 감흥도 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남자를 바라보는 순이의 시선에는 1920년대 조선의 청년 지식인, 조선의 뿌리 없는 근대를 바라보는 시인 김동환의 시선이 교차되고 있는 것이다.
식민지를 겪은 우리에게는 자동적인 의식 기제가 하나 있다. '식민지'라고 하면 즉각적으로 '민족'이라는 용어가 따라붙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대부분 책은 '국경의 밤'을 '식민지 민족의 애환'을 그린 시로 평가하고 있다. 우리는 여진족 후예인 순이를 같은 '민족'으로 수용할 정도로 관대하지는 않았다. '민족' 증후군이 자동적으로 발동한 것이리라. 어쩌면 '민족'이라는 용어야말로 우리가 식민지 혹은 식민지 문학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방해한 방어적 의식기제였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우리 사회도 '민족'이라는 방어막에 의지하지 않고 식민지 역사와 문학, 그리고 시대를 살았던 인간의 삶을 있는 그대로 대할 수 있을 정도의 내적인 힘을 갖추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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