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라오스 오지마을에 병원 세워…산이 있어 꿈꾸었고, 산 때문에 삶 배웠다
권경업(64'부산시 동래구 사직동) 씨. 그는 산악인이며 산악시인이다. 그리고 더불어 사는 삶이 행복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권 씨는 1982년 히말라야 원정대의 등반대장을 맡아 등반에 성공했고 1990년에는 한국 최초로 백두대간을 종주했다. 백두대간을 걸으면서 그는 연작 시 60여 편을 발표해 조금은 낯선 '산악시인'이라는 이름도 얻었다. 그는 1989년 노인을 대상으로 무료급식소를 열어 전국에 노인무료급식소의 씨앗을 뿌렸고, 어려운 나라에 병원을 세웠다. 2011년 네팔의 체풀룽에 건립한 '토토하얀병원'과 2015년에 라오스 오지에 세운 '모자병원'이 그것이다. 아직도 꿈을 꾸고 있다는 권 씨. 도대체 산은 그에게 무엇을 준 것일까.
-당신에게 산은 무엇인가.
▶가난한 소년에게 산은 유일한 탈출구였다. 산은 소년의 배고픔과 서러움과 억울함을 따뜻하게 품어주었다. 소년은 산을 통해 꿈을 꾸게 되었고 마침내 그 꿈은 기적처럼 조금씩 이루어졌다. 나에게 산은 삶이며, 내 인생의 스승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어차피 내려올 산, 왜 오르느냐고.
▶산꼭대기는 등산의 목표가 아니다. 산꼭대기란 곳은 속인이 오래 머물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춥고 좁으며 저녁이 되면 기온이 내려가는 장소다. 그래서 빨리 내려가야 하는 곳이다. 그런 의미에서 등산이란 말은 맞지 않다. 하산이라는 말이 더 적당하다.
-하산이라는 말이 더 맞다?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등산이라고 하면 오르는 것이 목표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등산은 정상이 목표가 아니다. 하산을 잘하는 것이 진정한 등산이다. 하산할 때 사고가 많이 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하산을 잘해야 한다. 조심하고 겸손하게 내려와야 한다.
-그러면 산을 오르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산행은 하늘에 다가가는 길이다. 그런데 큰길을 통해서는 정상에 오르지 못한다. 꼭대기에 가까울수록 길은 좁아지고 가팔라진다. 몸을 줄여야 오를 수 있다. 욕심을 부리며 무겁게 해서는 하늘에 이를 수 없다. 자신을 비우고 비워 실낱같이 가벼워져야 작은 길을 통해 산의 정상에 이르게 된다. 산을 오른다는 것은 '비운다'는 의미다.
-히말라야도 올랐다. 정상에 이르면 어떤 생각이 드나.
▶허무다. 정상에 올라섰을 때 그곳에는 공허한 하늘만이 있을 뿐이다. 그 절대고독과 외로움을 맞보기 위해 산을 다시 찾는다. 꼭대기에 대단한 영광과 자부심이 있다고 생각하면 결국 어려움을 맞는다.
-마치 구도자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1960, 70년대 산악인 중에는 구도적인 산행관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산행이 신앙생활처럼 엄숙했으며 겸손했다. 산이 품고 있는 모든 것들에게 배려와 관심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구도승처럼 산을 통해 더 높은 정신세계에 이르려고 했다. 정복의 의미가 아니었다.
-산을 오르면서 무엇을 생각하는가.
▶'산길의 미학'이다. 산길은 온전히 자신의 몸을 고스란히 타인의 행복을 위해 내놓는다. 산길을 걸으면서 뭇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표피가 벗겨지고 맨살이 짓뭉개지기까지 하는 산의 희생정신을 보게 된다. 자연스럽게 이타심의 위대함을 알게 된다.
-히말라야에 병원을 지은 것도 이타심 때문인가.
▶1982년 한강 이남에서는 처음으로 히말라야 원정을 했을 때 그 당시 월급이 15만원이었다. 등반을 위해 든 돈이 1억5천만원이었다. 요즈음 가치로 환산하면 40억원쯤 되는 돈이다. 히말라야 현지 사람 230명이 15일 동안 무거운 짐을 메고 동행했다. 그들 중에는 신발을 신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설산을 맨발로 걸은 것이다. 60㎏의 짐을 지고 맨발로 걷는 그들에게 주어진 돈은 하루에 1달러가 되지 않았다. 그때 생각했다. 등반을 위한 경비의 10%만이라도 그들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곳 생활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그 이후 두 번 다시 히말라야 등반을 하지 않았다.
-인생의 전환점을 맞은 셈이다.
▶그렇다. 히말라야에서 돌아온 이후 '진짜 세상'을 살게 됐다. 그 이전에는 산에 미쳐 땅에 발을 붙이고 살지 못했다. 등산이라면 직장도 미련 없이 포기할 정도였다. 진짜 세상을 살리라 마음먹고 열심히 돈을 벌었다.
-어떻게 벌었나.
▶1980년대 초 형제들이 나를 위해 터미널 부근에 조그마한 국숫집을 차려주었다. 미친 듯이 일을 했다. 잠도 자지 않고 맛있는 국수를 만들기 위해 연구하고 재료를 아끼지 않았다. 모두들 내가 만든 국수를 좋아했고 1년 만에 빚을 갚고 다시 1년 만에 집을 사게 됐다.
-국수가게를 차린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나에게 국수는 '음식'이 아니다. 국수는 배고픔이고 사랑이고 눈물이다. 어릴 적 어머니와 나는 자그마한 표 하나를 들고 수십 리를 걸어갔다. 표를 내미니 국수 한 그릇이 우리 모자의 손에 쥐여졌다. 나는 배가 고파 허겁지겁 먹었고 어머니는 남은 국물을 마셨다. 그때는 그것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어머니의 배고픔을 알게 됐다. 철이 든 것이다.
-그 국수가 이제는 노인의 배고픔과 눈물을 달래주고 있다.
▶국수가게가 한창 잘 될 무렵인 1989년이었다. 동네 근처 성지곡 공원에 물을 뜨러 갔다가 무리지어 있는 노인들을 보게 됐다. 여러 명이 햇볕을 쬐고 있었는데 한눈에 굶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많이 굶어본 사람은 굶고 있는 사람을 단박에 알아볼 수 있다. 그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노인무료급식소를 열었나.
▶굶고 있는 그 노인이야말로 질곡의 한국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냈으며, 경제성장을 이룬 주인공들이다. 그들을 굶주리게 할 수는 없었다. 성지곡에 솥을 걸어 국수를 직접 끓였다. 맛있게 먹는 그들의 모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내가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노인 대상 무료급식소가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시작한 지 1년 만에 부산에 무료급식소가 7군데, 그다음 해에 17군데가 더 생겼다. 전국에 노인무료급식소가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내 호주머니를 털었지만 여러 곳으로 늘어나자 '아름다운 사람들'이라는 사회단체를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함께할 수 있도록 바꾸었다.
-처음에는 의도를 의심받았을 것 같다.
▶모두들 '정치하려고 하는 것 아니냐'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도 정치를 하지 않고 이 일을 계속하자 진정성을 믿어주었다. 성지곡 무료급식소는 문을 연 지 30년이 다 돼간다.
-다시 네팔로 돌아가서 그곳에 병원을 짓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길이 끝나고 7일을 더 걸어가야 도착할 수 있는 오지에 병원을 지었다. 2005년 부지를 선정하고 2007년 자금과 장비를 보내고 2011년 10월에야 비로소 네팔 체풀룽에 '토토하얀병원'이 지어졌다. 일을 하면서 사기를 당하는 등 너무 힘들어 두 번 다시 오지에 병원을 짓지 않으리라 다짐할 정도였다.
-그런데 지난해 라오스에 또 병원을 지었다.
▶라오스에 사는 선배 산악인이 라오스에도 병원이 필요하다고 해서 시작하게 됐다. 지난해 2월 그곳을 방문해 시엥쿠앙주 국회의원을 만나면서 부지 선정과 병원 건립, 병원시설 수송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지난해 10월 '분틴-여민락 모자병원'이 지어졌다. 15병상이고 3만여 명에게 진료혜택이 주어지게 됐다.
-혼자 힘으로 하기 어려울 듯한데.
▶산을 통해 만난 이들이 함께했다. 이들은 내가 하는 일이면 모든 것을 뒤로하고 돕고 있다. 큰 것은 내가 마련하지만, 물품 구입에서부터 건축 설계 등 많은 것을 주변 지인의 도움으로 해결하고 있다. '아름다운 사람들' 멤버 모두가 든든한 후원자다. 그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가족의 반응은 어땠나.
▶돕고 살아야 한다는 뜻을 아내와 자녀도 적극 지지해주고 있다. 라오스 병원의 건설비는 집사람(식당 덕천고가 대표)이 기부한 것이다. 무료급식을 시작할 때도 집사람이 흔쾌히 동의해주었다,
-시는 어떻게 쓰게 됐나.
▶한 잡지에서 창간 1년을 기념하여 8개월간 백두대간을 종주하며 글을 싣는 코너를 만들었다. 아무도 할 사람이 없어 결국 나에게로 넘어왔다. 떠밀려서 하게 된 것이 점차 빠져들게 됐다.
-'산악시'라는 새로운 장르를 열었다.
▶순전히 산에서 느낀 것을 적었다. 산을 걸으니 시가 나왔고, 침낭에 누워 하늘의 별을 보면 시가 됐다. 그렇게 쓰기 시작한 것이 어느덧 17권의 시집으로 만들어졌다. 누구나 산에 있으면 감성이 열린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해보고 싶어진다.
-그런데 등단은 하지 않았다.
▶내 스타일이 아니다. 시인이랍시고 어느 귀퉁이에 끼여 있는 것이 싫다.
-한국의 산은 거의 다 올랐다고 들었다. 가장 아름다운 산은 어디인가.
▶세상 어디에도 사람만 한 산이 있겠는가? 가장 아름답고 험하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나는 세상에서 하고 싶은 것을 다해봤다.(웃음) 벌 만큼 벌어보기도 하고 쓸 만큼 써보기도 했다. 살면서 오지에 3개의 병원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네팔과 라오스에 지었으니 이젠 캄보디아 톤레삽 호수에 수상병원을 지을 생각이다. 5년쯤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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