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아! 어머니

입력 2015-12-28 01:00:06

"아 참으로 슬픕니다…유림의 사명을 받들고 해외로 떠나려 할 때…여러 날을 주저하였습니다…부득이 말씀드렸더니 '네가 이미 나랏일에 몸을 허락하였으니 늙은 어미를 생각하지 말고 힘쓰라' 하셨습니다…절하고 겨우 하직은 하였으나 열 걸음에 아홉 번을 돌아보며 차마 앞으로 가지 못했습니다…어머님께서는 운명하실 즈음에…소자를 보지 못하는 지극한 한으로 '창숙아'를 세 번 부르시고는 흐느끼며 운명하셨다 합니다…소자 지금 피눈물로 울며 무덤 앞에서 뒹굴고 있는데 어째서 어머님은 한 번도 창숙을 부르시지도, 불효한 죄를 책하시지도 않으십니까…죽어서 무슨 면목으로 뻔뻔하게 지하에 돌아가 모시겠습니까?"

심산 김창숙(1879~1962). 그는 1919년 3'1만세에 참여 못한 죄책에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독립 호소를 위해 유림대표로 독립청원서를 갖고 그해 3월 25일 중국으로 떠났다. 고향 성주에서 노모와 헤어지며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이후 독립운동으로 다시 뵙지 못했다. '열 걸음에 아홉 번 돌아보며' 나눈 인사가 마지막이 되었다. 1920년 4월 상하이에서 어머니 별세 소식을 듣고 1927년 일제에 붙잡혀 국내로 압송돼 감옥'감시생활 중 1940년 5월 어머니 묘소를 찾아 이별 21년 만의 사모곡(思母曲)으로 애를 끓였다. 그리고 시묘살이로 불효를 대신했다.

모자 이야기는 기록에 숱하다. 유학의 효(孝) 문화 결과다. 효는 승속(僧俗)이 따로 없다. 삼국유사에 여러 관련기록을 남긴 일연(一然) 스님부터 그렇다. '목암'(睦庵)이란 스님의 호가 효를 드러낸다. 중국 '목주'(睦州)의 스님 '진존숙'을 사모해 지은 호다. 진 스님은 어머니를 위해 짚신을 삼아 곡식으로 바꿔 봉양했다. 돌아가신 뒤에도 짚신을 삼아 몰래 새벽에 큰 길가 나무에 걸어두어 길손을 도왔다. 일연 스님 역시 9세 출가 이후, 왕명을 받드는 국존(國尊) 자리까지 올랐지만 진 스님처럼 어머니와 함께하고자 주로 고향 압량 가까이 머물렀다. 79세 스님이 96세 노모와 작별할 때까지 그랬다.

요즘 안동 예안 이씨 16대 종부로 95세로 삶을 마친 권기선 노모와 70세 아들 이준교 17대 종손 이야기를 다룬 영화 '나의 아들, 나의 어머니'가 회자하고 있다. 18세에 시집와 홀로 아들을 키우며 70년 세월을 버틴 어머니를 모시려 낙향한 아들 이야기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애비야, 애비야' 하며 부르는 어머니와 그 곁을 떠나지 않는 아들. 심산과 일연 스님의 모자 삶처럼 가슴이 애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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