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12월 프랑스 파리의 한 카페. 사람들은 자신들을 향해 돌진하는 기차의 모습에 기겁한 나머지 달아나기 바빴다.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최초의 영화 '열차의 도착'이 대중에게 처음으로 공개된 날의 풍경이었다. 영화의 탄생이었다. 태초에 영화는 관객이 있음으로 존재할 수 있었고, 그것은 12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다.
상업영화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은 수의 극장에만 걸리는, 혹은 아예 극장에 걸릴 수조차 없었던 독립영화는 영화 완성의 마지막 조각인 관객들을 만나기 위해서 더 많은 노력을 할 수밖에 없었다. 1990년 장산곶매가 제작한 '파업전야'는 노동자의 파업을 주제로 다뤘다는 이유로 극장은커녕, 상영 자체가 금지되었다.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 필름을 반출하려면 형사들을 따돌리는 위해 007작전을 펼쳐야 했고, 영화가 상영되는 대학가에선 전경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수백 명의 사수대가 상영 현장을 지켰다고 한다. 영화를 보는 것이 곧 투쟁이었던 악조건 속에서도 30만 명이 넘는 엄청난 수의 관객들이 보았다고 한다. 2000년대 들어서는 재일조선인 학교를 다룬 영화 '우리 학교'가 다큐멘터리로는 드물게 7만 명의 관객 수를 기록했다. 그 중 극장에서는 4만 명, 극장이 아닌 곳, 다시 말해 '공동체 상영'으로 3만 명이 넘는 관객이 영화를 보았다. '우리 학교'는 대학교와 중'고등학교, 인터넷 커뮤니티, 교사 모임, 문화의 집, 교회 등 다양한 곳에서 300회 이상의 공동체 상영이 이루어졌다. 지금은 독립영화 배급과 상영에 있어서 중요한 시스템으로 자리 잡은 공동체 상영이 '우리 학교'를 통해 그 기반이 다져진 것이다. 자신들이 있는 공간과 커뮤니티 속으로 영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관객들의 힘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최근 관객의 힘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있었다. 대구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에서 세월호 참사에 관한 영화인 '나쁜 나라'를 관람한 한 관객이 영화를 본 후 마음이 너무 아프다며, 극장 좌석의 전부인 55석의 티켓을 모두 구매해, 이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사람들이 꼭 봤으면 좋겠다는 메시지와 함께 그 티켓을 기부한 것이다. 이 일이 SNS로 알려지면서, 부산과 서울에까지 '나쁜 나라' 관객 티켓 나눔이 확산되었다. 그리고 최근 '나쁜 나라' 관객 수는 독립영화의 흥행 기준이라 할 수 있는 1만 명을 넘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국가 권력으로부터 배제되고, 가로막히고, 고립되었던 영화 속의 상황과는 달랐다. 한 관객의 진심 어린 마음이 또 다른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고, 서로 이어지게 만들고 있다. 2015년 12월 120년 전의 그 사람들처럼 영화를 보고 도망치는 관객은 더 이상 없지만, 관객들의 힘에 의해 영화가 더 확장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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