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붉은 마귀들.
평화로운 이 강산을 침범했을 때
적의 진흙 발길은
골골마다 짓밟아 놨을 때
씩씩하고 어린 학도의용대
정기의 불타는 학도의용대
부르지도 않았건만 모여들었네
져야할 의무도 없건만 뭉쳐
모여 들었네
모두 다 스물 안팎
명모(明眸) 호치(皓齒)의 이 나라의 준총(俊聰)들
백수로 적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네
장렬하게 피를 뿜어 싸워 죽었네
군인 아닌 학도의 몸으로
옥이 되어 부서져 버렸네
찬란하다, 이 나라 소년의 의기
서릿빛 무지개 되어
이 땅 청산마다 길이 꽂혔네
아아 그대들 아내도 없고, 아들도 없네
그대들의 정기는
우리 겨레 모두가 이어 받들리
삼천만 온 겨레가
가슴속에 고이 이어 받들리
그대들, 평안히 눈을 감으라
그대들의 의기는
우리 겨레의 이름과 함께
천추만대에 태양같이 빛나리라
월탄 박종화 시인이 학도의용군들의 의로운 희생을 기린 '전몰 학도의용병에게'라는 시다.
군번도. 계급도 없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름, 학도병이다.
포항에는 이들의 희생을 추모하고 넋을 위로하는 기념관이 있다. 어린 학생의 신분으로 조국을 지키기 위해 꽃잎처럼 떨어진 아름다운 청춘들의 가슴 아린 이야기가 생생히 살아나는 곳이다.
◆학도의용군(학도병)
학도의용군이 처음 편성된 것은 피란길에 나선 서울시내 각급 학교의 학도호국단 간부 학생 200여 명이 수원에 모여 '비상학도대'를 조직하면서부터였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교복과 교모를 그대로 착용한 채 소총과 실탄을 지급받아 1950년 6월 29일부터 한강 방어선을 지키고 있던 국군부대로 들어가 전투에 참가했다. 그러나 국방부 정훈국은 비상학도대 산하에 있는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피란민 구호, 전황 보도 및 가두 선전 등 주로 후방에서의 선무공작을 담당하도록 했다.
많은 학생들은 후방에서의 임무 수행만으로는 의분을 달래지 못해 개별적으로 현역 입대를 지원해 나갔고, 나머지 학생들도 국방부에 학도만으로 전투부대를 구성해서 일선에 나설 수 있도록 허가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국방부 고위 인사들은 국가의 장래를 짊어질 학도들의 참전을 만류하면서 정훈국의 지도에 따를 것을 종용했다. 7월 1일 대전에 내려온 피란 학도들과 현지의 학도들은 다시 '대한학도의용대'를 스스로 조직했다.
어린 중학생 소년에서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학도의용군의 이름으로 실전에 참여한 학도들은 그로부터 6'25전쟁 전 기간을 통해 모두 2만7천700여 명에 이르렀고, 후방 또는 수복지에서 선무 활동에 참여한 학생들은 무려 20만 명이나 됐다.
개별적으로 현지 입대를 지원, 국군 정규 부대의 장병으로 참전하는 학도들이 줄을 이었으며, 상당수의 여학생들도 간호원으로 출정했다. 학도의용병들은 대구로 내려가 다시 한 번 조직된 다음 국군 10개 사단과 그 예하 부대에 편입돼 마지막 보루였던 낙동강 방어선에서 계급도 군번도 없이 백의종군하는 가운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 가운데 약 700여 명의 학도병은 7월 중순 부산에서 유엔군으로 편입돼 일본에 건너가 훈련을 마친 다음 9월 15일 개시된 인천상륙작전에 정규 부대원으로 참전했다.
또 국군 제3사단 예하의 22연대와 26연대, 국군 제1사단 예하의 15연대는 7월 중순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보충병 대부분을 학도병으로 채웠고, 8월 초순 대구에서 새로이 편성된 국군 25연대도 병력의 대부분을 학도병으로 채웠다.
이들 부대에 들어간 학도들은 기계(杞溪)'안강(安康)'다부동(多富洞)'포항 등 여러 곳에서 숱한 희생을 입어 가며 조국 수호의 초석이 됐다.
특히 학도병들의 희생적인 애국정신은 낙동강 방어선의 최대 요충지이던 포항에서의 공방전으로 대표된다.
7월 14일 대구에서 군의 조직과는 별도로 오로지 학생들만으로 편성된 보병 제3사단 학도의용군 71명은 동해안을 따라 밀고 내려온 북한 제5사단 및 766유격대에 맞서 포항시가를 사이에 두고 혈전을 벌이는 가운데 48명이 전사하는 막대한 희생을 입어가면서도 이곳을 끝까지 사수했다.
1951년 3월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저지하고 전선의 균형과 안정을 회복하자, 피란처를 찾아 남으로 내려갔던 국민들도 고향으로 돌아와 생업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가의 앞날을 짊어질 청년학도들은 시급히 학원으로 돌아가 학업을 계속하라는 담화를 발표했고 문교부는 전국에 흩어진 학생들에게 복교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학도의용군은 3월 16일 강원도 홍천에서 무기를 놓고 군복을 벗게 됐으며, 다수의 북한 출신 학도병들을 비롯해 끝까지 싸우기를 주장하던 학도들은 다시 현지에서 입대, 합당한 계급과 군번을 받게 됐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가슴 저미는 학도병의 편지
우리나라 학도의용군의 활약상이 가장 두드러지는 곳을 꼽으라면 바로 포항여중 전투다.
6'25전쟁 발발 후 국군은 낙동강까지 밀리면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북한군은 포항을 침략하기 위해 물밀듯 내려왔으나 한국군 제3사단 후방지휘소였던 포항여중에서 경계 중이던 학도병들과 맞닥뜨렸다. 기회를 엿보던 북한군은 1950년 8월 11일 새벽을 틈타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학도병들은 초전에는 적을 격퇴시키는데 성공했으나 끈질긴 북한군이 다시 장갑차를 앞세우고 공격해오자 포항여중 운동장에서 백병전까지 벌이는 치열한 격전을 치렀다. 중대원 71명 중 48명이 전사하고 13명은 부상당했으며 나머지 10명은 포로가 됐다가 대부분 적진을 탈출해 살아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당시 전투에서 숨진 학도병의 군복 주머니에서 한 통의 편지가 발견됐다. 서울 동성중학교 3학년인 이우근 학도병이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에 들었을 때 어머니께 급히 써내려간 편지다.
다시 어머니께 편지를 쓰겠다고 했던 이우근 학도병이 쓴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가 살아남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1950년 8월 10일 목요일 쾌청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나의 고막을 찢어 버렸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귓속에는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머니,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님께 알려 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옆에서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볕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적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머니,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손수 빨아 입었습니다. 물 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두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님이 빨아 주시던 백옥 같은 내복과 내가 빨아 입은 내복을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청결한 내복을 갈아입으며 왜 수의(壽衣)를 생각해 냈는지 모릅니다. 죽은 사람에게 갈아입히는 수의 말입니다.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이 그냥 물러갈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니,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어머님도 형제들도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이제 겨우 마음이 안정되는군요.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님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켜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그럼.
서울 동성중학교 3학년 학도병 이우근
편지를 읽으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꼭 살아 돌아가 어머니와 함께 상추쌈을 먹고 싶어했던 그 아이,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켜고 싶다는 그 아이. 철부지 중학생에 불과한 그 아이가 느꼈을 공포감,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편지 한 통에 절절히 담겨 있다.
조국을 지켜야겠다는 일념으로 연필 대신 총을 잡은 그들의 숭고한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을까?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가 영화로 되살아났다. 지난 2011년 10월 개봉된 영화 '포화 속으로'가 바로 포항여중에서 학도병들이 치열하게 싸웠던 실화를 바탕으로 영화로 만들어져 당시 300만 명 관객의 심금을 울렸다.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과 전몰학도 충혼탑
1950년 6'25전쟁 당시 공산 괴뢰군의 불법 남침으로 조국의 운명이 위기에 처하자 나이 어린 학도들은 붓을 총으로 바꾸어 쥐고 교복을 입은 채 자진해서 학도의용군으로 전쟁터에 나갔다. 대한 젊은 학도의 기백을 어김없이 발휘하고 산화한 어린 꽃봉오리 김춘식 외 47명과 더불어 1천394위의 영령들이 봉안돼 있는 성스러운 곳이 바로 포항 북구 용흥동 탑산에 있는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과 전몰학도 충혼탑이다.
이들은 군번도 계급도 부여받지 못하고 낙동강 최후 방어선인 이곳 포항에서 청사에 빛나는 전공을 세우고 조국과 민족을 지켜낸 20세기 화랑들이다.
6'25전쟁 당시 조국이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국내외 학생들은 펜을 던지고 총검을 잡고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자진 참전해 꽃다운 나이로 7천여 명이 산화했다. 국내 학생 5만여 명과 재일 유학생 641명이 전투에 참가한 것을 비롯 약 20여만 명이 후방 선무 및 공작 활동, 위문 활동, 잔비소탕작전 등에서 활약했다.
특히 이곳 포항은 낙동강 최후 방어선으로 육군 제3사단 소속 학도의용군 71명이 포항여중(현 포항여고)에서 단독으로 전투에 참전, 김춘식 외 47명이 산화한 곳이며 전국에서 제일 많은 학도의용군이 희생된 격전지다.
이곳 출신 생존 학도의용군들은 1979년 8월부터 탑산에 터를 잡고 학도의용군 전적물 보존, 추념행사 및 현지안보교육을 하고 있다. 1996년 6월 청와대 등 각계에 건의 및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 건립을 추진해왔고 국방부의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 일환으로 건립비 중 일부가 국비 지원되면서 포항시는 2001년 3월~2002년 7월에 걸쳐 기념관을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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