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아름다운 포기

입력 2015-12-08 03:00:01

'포기는 김장철 배추를 셀 때나 하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맞는 말이다. 집념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하는 것은 성공으로 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빠르게 단념하고 포기하는 용기가 필요할 때도 있다.

우리 센터에 너무나 소녀 같고 긍정적인 회원이 한 분 계신다. 67세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밝고 에너지 넘치는 분이시다. 꿈꾸고 노력하는 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는 철학을 가지고 계신 그분이 며칠 전 장기자랑 시간에 가곡 '동심초'를 불러 주셨다. 맑고 고운 목소리로 애틋하게 불러 수업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을 감동하게 만들어 주셨다.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이렇듯 아름다운 가사와 곡조를 가진 이 노래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가곡이다.

여고 1학년 음악 시간 첫 번째 실기시험 곡명이 바로 동심초였다. 슈베르트와 흡사한 외모를 가진 부리부리한 눈의 음악 선생님은 시험이 끝난 후 나를 포함한 서너 명의 친구를 호명하며 잠시 남아 있으라고 하셨다. 학교 합창단에 입단하라는 권유를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우리학교 합창단은 해마다 시민회관에서 발표회를 가질 만큼 인정받는 우수한 조직이었다. 학교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나와 함께 있던 친구들은 좋아서 어쩔 줄 몰라했다.

하지만 나는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합창단이 되면 단복과 한복을 구입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예쁜 옷을 갖추어 입고 무대에 서는 로망을 나 또한 갖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사복 첫 세대로, 앞집 사는 육촌 언니의 빛바랜 청바지를 얻어 입고 학교를 다니는 형편이었다. 칠판 구석 공납금 미납자 명단에는 항상 내 이름이 차지하고 있었다. 집안 형편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나는 어머니께 말씀드릴 수 없었다. 그래서 아쉽지만 내 선에서 정리하기로 바로 마음을 먹었다. 음악 선생님께는 공부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합창단 활동을 할 수 없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선생님은 그 큰 눈으로 나를 보며 무섭게 화를 내셨지만 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합창단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씀 드리기엔 어설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아쉽지만 아련하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다가온다. 당시의 나는 포기하는 용기를 발휘했던 거라 생각한다. 욕심이 나지만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에 연연하지 않는 단호함, 아름다운 단념의 기억이 아닌가 싶다. 어린 여고생이었던 나는 아름다운 포기를 함으로써 스스로 자존심을 지켰으며,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하였다. 10년 후에는 또 어떤 것을 추억하고 있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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