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通] '고속도로 황태자' 오르간 독주자 나운도

입력 2015-11-07 01:00:05

나훈아+설운도 '짝퉁'? 제 DVD 보셨나요 당당히 제 음악 합니다

나운도 씨가 다단 오르간을 펼쳐 놓고 연주를 하고 있다. 보통은 3, 4단으로 연주를 하지만 특별한 무대에서는 9단까지 업그레이드된다. 나 씨는 악기를 모두 꾸미는 데 2천만 원 정도가 들었다고 귀띔했다. 나운도 씨 제공
나운도 씨가 다단 오르간을 펼쳐 놓고 연주를 하고 있다. 보통은 3, 4단으로 연주를 하지만 특별한 무대에서는 9단까지 업그레이드된다. 나 씨는 악기를 모두 꾸미는 데 2천만 원 정도가 들었다고 귀띔했다. 나운도 씨 제공

오르간 독주자 나운도(본명 손재섭'61). 이름보다 '고속도로의 황태자'라는 별명이 더 익숙하다.

20대 초반 그는 기타리스트였다. 밤무대 밴드에서 '애수의 소야곡' 전주로 관객을 녹였다. 어느 순간 오르간이 그에게 다가왔다. 언제부턴가 밴드에서 그의 자리는 기타에서 오르간으로 옮겨져 있었고 키보드 선율이 카바레의 벽을 울리고 있었다.

운명처럼 귀인(貴人)을 만났다. 조용필과 함께 음악 활동을 했던 홍승민이었다. 홍 씨와의 만남 이후 지르박, 트로트, 차차차에 갇혀 있던 음악 세계가 대중가요, 팝, 클래식까지 지평을 넓혀갔다.

홍 씨가 대구에서의 짧은 유랑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갈 때 그도 사부이자 멘토를 따라 주저 없이 짐을 꾸렸다. 서울에서 이리저리 밤무대 밴드를 알아보고 있을 즈음 갑자기 '10'26 사태'가 터졌다. 나 씨의 첫 상경기는 이렇게 끝을 맺었다.

다시 동촌카바레로 돌아왔다. 때마침 밤무대에서는 오르간 독주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자동반주 기능을 갖춘 야마하 오르간이 쏟아져 나왔다. 이 오르간 선율이 밴드맨들에게는 장송곡이었지만 나 씨에게는 새 시대 개막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몸값은 부르는 게 값이었죠. 1980년대 초 36만원 월급이 80만원으로 뛰었어요. 당시 지은 지 얼마 안 된 황금아파트가 350만원이었으니 대충 몸값이 계산될 겁니다."

하지만 한동안 성가(聲價)를 올리던 그의 독주 무대도 점차 기세가 꺾였다. 발라드, 팝에 아이돌 가수들까지 등장하며 음악계의 판도가 바뀌었다. 대구의 카바레들도 하나둘씩 자취를 감추었다.

프리랜서로 대구의 카바레를 전전하던 나 씨는 잠시 오르간을 놓고 녹음실을 운영했다. 그때 음반 제작이라는 새 시장에 눈을 뜨게 되었다. 자신의 오르간 연주 CD를 자체 제작해 전국에 뿌렸다. 반짝 수요에 음반은 팔렸지만 이내 부메랑이 되어 날아들었다. 업소에서 CD만 틀고 연주자를 부르지 않았던 것이다. CD가 나올 때마다 아류작들이 쏟아져 나온 것도 패착의 한 원인이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이때의 경험은 음악 인생에 대전환을 가져다준 사건이었다. 전국 최초 DVD 제작이라는 결정적 영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나 씨는 자신의 연주를 정교하게 다듬고 오르간을 8, 9단으로 업그레이드했다. 기존 연주자와 차별화해 비주얼과 퍼포먼스를 강화했다.

작업실에서 산고 끝에 만들어진 DVD 테이프가 GM뮤직(옛 서울음반) 기획실로 들어가고 드디어 제작사의 OK 사인이 내려졌다. DVD시장의 타깃은 카바레나 회관이었다. 기존의 음향만으로 승부하던 CD를 대체할 획기적 수단이었다. 그러나 대박 전조는 전혀 엉뚱한 데서 들려왔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주문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밤새 작업을 해도 물량을 대지 못했다.

"아마 대한민국 관광버스에 제 DVD 한두 장 없는 곳은 없을 겁니다. 어! 저게 뭐지? 묘기에 가까운 제 연주 모습이 나오자 한마디로 난리가 났죠. 처음으로 선보인 다단(多段) 오르간도 대중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을 겁니다."

나훈아를 닮은 외모와 우수 깃든 표정, 울먹이듯 노래하는 모습은 어느새 나 씨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DVD가 뜰수록 한편으로 나 씨와 음반사의 고민도 함께 커져 갔다. 바로 짝퉁들의 '공습'이 염려됐기 때문이다. CD 음반 때도 피해를 경험했기 때문에 하루하루 시장 동향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류 DVD는 나오지 않았다. 음반사마다 수도 없이 기획 DVD를 찍었다고 한다. 그들이 나운도 장벽을 넘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암보(暗譜) 즉, 악보와 가사를 외우는 데 서툴렀기 때문이다. 나운도의 밴드, 밤무대 경력은 모두 30년. 웬만한 트로트나 대중가요는 제목만 떠올려도 손이 먼저 반응한다.

"제 영상은 모두 표정이 살아있어요. 악보, 가사를 모두 암기했기 때문이죠. 일부 연주자들이 악보를 앞에 놓고 연주를 하니까 시선 처리가 어색하고 감정을 살리지 못했던 것 같아요."

화불단행(禍不單行'불행은 혼자 오지 않는다)만 있는 게 아니었다. 복(福)도 한번 오기 시작하니 겹쳐서 왔다. DVD가 팔리면서 많은 매체에서 나 씨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러브콜이 밀려들었다.

엠넷(Mnet)의 '트로트X' 출연도 이때 이루어졌다. 2014년 6월 이 대회에 전국에서 3만 명이 몰려들었다. 1차 본심에서 60명이 올라왔고 5번의 서바이벌 경연이 펼쳐졌다. 나 씨의 최종 성적은 16강이 겨루는 세미파이널. 그러나 대중의 주목도는 우승자인 나미애를 능가했다. 어느덧 나 씨의 화려한 건반 퍼포먼스는 관광버스에서 TV로 옮겨 붙고 있었다.

DVD 매출도 부쩍 늘었다. 1, 2집만 15만 장이 팔렸다. 요즘 음반 집계가 흐릿한 상황을 가정하면 업계에서는 8집까지 50만 장 정도 팔린 것으로 추정한다. 경향 각지에서 섭외, 행사 초청이 줄을 이었고 출연료도 더블로 뛰었다.

"가까이서 지인들이 불러 주면 100만, 200만원도 받고 규모가 큰 무대에서는 300만, 400만원도 받습니다. 금액과 관계없이 제 음악이 쓰일 데가 있다는 것에 저는 더 만족합니다."

최근 나 씨는 작곡에 골몰하고 있다. '있다 없다' '앙큼한 여자' '숨겨둔 사랑'이 요즘 뜨는 그의 작품이다. 지역 가수 정인숙, 박혜성, 김수진이 열심히 이 노래를 퍼 나르고 있다.

1954년생의 나운도 씨, 올해로 환갑을 맞았다. 칠성동의 한 밴드에서 기타를 잡은 후 수십 년이 흘렀다. 그동안 나 씨는 정체성에 많은 혼란을 겪었다. 아직도 대중은 나 씨에게서 짝퉁 설운도와 이미테이션 나훈아를 읽어낸다. 그의 오랜 지인들은 '동촌 카바레 손(孫) 올갠'으로 기억하기도 한다. 이젠 그를 '오르간 독주자'로 부르는 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이 이름을 찾는 데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고속도로 황태자' 나운도 씨. 언젠가는 인기를 내려놓고 '자연인 손재섭'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래도 그를 찾는 무대가 있어 오늘도 웃으면서 9단 오르간을 카고 트럭에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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