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새論새評] 헬조선

입력 2015-11-05 02:00:11

교과서를 바꾸면 지옥이 천국 될까?

극심한 양극화가 현실 절망에 빠뜨려

국정화 타령 말고 젊은이 삶 들어보라

힘든 현실 만든 집권세력이 책임져야

"세계 모든 나라가 대한민국의 성장과 발전을 부러워하는데 정작 나라 안에서는 헬조선이란 단어가 유행이다. 이는 부정적인 역사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마침내 나라가 '헬조선'이 된 원인을 찾아냈다. 좌파 교과서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교과서를 바꾸면 정말 지옥이 천국이 될까?

젊은이들이 대한민국을 '헬조선'이라 부르는 데에는 나름 객관적 근거들이 있다. 예를 들어 미국 갤럽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성인 남녀 행복지수는 100점 만점에 59점으로, 전 세계 143개국 중 118위라고 한다. 팔레스타인과 같은 수준이다. 다른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삶의 만족도는 34개국 중 29위로 OECD 바닥 수준이다. 게다가 한국의 1인당 평균 노동시간은 2천124시간. 전 세계에서 한국보다 노동시간이 더 긴 나라는 멕시코밖에 없다. OECD 평균이 1천770시간이니, 한국의 노동자는 다른 회원국 노동자들보다 연간 354시간을 더 일하는 셈이다. 참고로 한국의 노동자는 독일의 노동자보다 1.6배 더 오래 일한다. 1년에 넉 달을 더 일하는 셈이다.

출산율, 사회복지,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 등 긍정적 지표는 OECD 최하 수준인 반면, 산재사망률, 가계부채 증가율, 남녀 간 임금격차 등 부정적 지표는 OECD 최고 수준이다. 게다가 자살률은 OECD 내에서 지난 13년간 부동의 1위를 유지해 왔다. 이는 좌파 교과서의 내용이 아니다. OECD에서 발표한 자료다.

한국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29.1명으로 OECD 평균의 두 배가 넘는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중에서도 최근 20, 30대 청년의 자살률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작년 전체 자살률이 27.3명으로 다소 감소하는 사이에 20대의 자살률은 오히려 4.2명이 늘어났다. 20대가 노인 빈곤층 못지않게 삶에 절망을 느끼고 있다는 얘기다.

현재 한국사회의 상위 10%가 전체 부(富)의 66%를 소유하는 동안 하위 50%는 전체 자산의 2%만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자산만이 아니라 소득 역시 극심한 양극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현재 임금근로자 상위 10%가 전체 근로소득의 32%를 받아가는 반면, 하위 10%는 불과 0.6%의 소득만을 가져갈 뿐이라고 한다. 법인세 깎아주고 규제를 완화해 준 후 기업들의 사내유보금은 30배로 증가했지만, 그 돈이 고용을 늘리는 데에 쓰이지는 않았다. 취업의 문은 좁아지고 있다. 용케 그 문을 통과한다 해도 삶에 희망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자산과 소득의 극심한 양극화로 인해 열심히 일을 해도 재산을 모으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것이 헬조선의 실상이다. 이게 교과서 탓일까? 유감스럽지만 나라를 이 모양으로 만드는 데에 좌파 교과서는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다. 헬조선의 현실은 그동안 새누리당 정권이 일관되게 펼쳐온 정책들의 결과일 뿐이다. 그럼에도 애먼 교과서를 물어뜯는 것을 보면, 도대체 문제를 문제로 인식할 정신조차 놓아버린 모양이다.

김무성 대표는 애먼 교과서를 탓하기 전에 '헬조선'이라는 말에서 무거운 죄책감부터 느꼈어야 한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젊은이들이 '지옥'이라 부르는 현실을 만들어낸 정치적 책임은 마땅히 집권세력이 져야 하기 때문이다. '헬조선'이 뭔지 알고 싶은가? 그럼 애먼 교과서 타령하지 말고 조성주 씨가 쓴 '청춘일기'를 읽어보시라. 헬조선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고투가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김 대표의 말대로 교과서를 바꾸면 '지옥'이 '천국'이 될지도 모르겠다. 듣자 하니 이번 이산가족 상봉에서 북측 가족들은 감시원이 없을 때에도 그분 덕에 낙원에 산다고 장군님 찬양에 바빴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국가의 견해가 곧 모든 개인들의 견해가 된다. 보라, 이렇게 인민들의 견해를 '국정화'하니, 지옥도 졸지에 지상낙원으로 바뀌지 않은가. 남과 북에서 공히 국정화를 선호한다니, 과연 조선은 하나다. 언제부터인가 북조선이 남조선의 미래가 되었다.

※진중권: 1963년생. 서울대 미학과.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철학과 박사 수료. 중앙대 겸임교수. 카이스트 겸직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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