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가끔 위안이 필요하다. 그럴 때면 내게는 머릿속에서 찾아가는 곳이 몇 개 있다. 무슨 사연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냥 아무런 생각이 없이 좋아할 뿐이다. 그냥 멍한 채로 그곳을 찾아간다. 거기에는 이유도 없고 설명도 필요 없다. 그중 하나가 '그냥 거기만 마음 속에 그리면 왠지 마음이 가라 앉고 차분해 진다'라고 이미 지난 2월 10일 자에 실린 '하이랜드 2코스'에서 잠깐 언급했던 모허 절벽이다.
모허 절벽은 유럽의 서쪽 가장 끝에 있는 나라 아일랜드 서쪽 해변가에 위치하고 있으며 여기서부터 대서양이 시작된다. 이미 한두 번을 간 곳이 아닌데도 모허 절벽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설 때마다 '헉!' 혹은 '헐!'이라는 요즘 유행하는 카톡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굳이 다른 표현을 한다면 구차하고 군더더기처럼 여겨질 정도로 앞에 펼쳐진 경치는 대단하다. 그 앞에 서면 나 자신이 너무 왜소해지고 초라해져서 자연의 거대함에 겸손해지고 숙연해진다.
아주 힘들게 용기를 내어 절벽 맨 끝에 서면 230m 아래의 바다가 까마득하다. 저렇게 끝도 없이 절벽을 보채는 파도는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초현실적으로 아득하다. 언젠가 "하도 높아서 맹렬하게 절벽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 그 절벽 끝에 서서 바로 아래를 내려다보면 공포는커녕 차라리 전율 같은 평화가 스멀스멀 기어든다"라고 글에 표현한 적이 있다. 정말 그렇게 모허 절벽에 서면 입 안이 마르는 공포와 함께 삶을 다하고 드디어 죽음을 맞을 때 느낄 듯한 극한의 안도 같은 평화가 다가선다.
주차장에서 조금 걸어 올라가면 바로 눈앞에 양쪽으로 각각 4㎞, 모두 8㎞의 절벽이 바다를 앞에 두고 늘어서 있다. 내가 느끼는 만큼의 감동을 누구나 느낀다고는 자신 못하겠다. 여기는 아무런 스토리도 별다른 역사도 없다. 심지어는 바위 하나에 매달려 있기 마련인 전설마저도 없다. 아일랜드인들이 게을러서 그런지 혹은 너무 현실적이라서 그런지, 있을 법한 그럴 듯한 전설도 하나 없다. 그래서 그냥 정말 '닥치고 경치나 봐야 할 뿐'이다. 그냥 자신이 보고 느껴야 하는 곳이다. 그래서 이런 역사도 스토리도 없는 경치 하나 보자고 수도 더블린에서 왕복 8시간, 금쪽같은 해외여행의 하루를 온통 여기에 투자할 '멍청이'가 어디 있느냐고 항의를 해도 별로 변명할 말이 없다. 그래도 연간 100만 명의 멍청이들이 이 절벽 하나 보자고 찾아온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어찌 되었건 내 생각에는 유럽까지 와서 그것도 아일랜드까지 와서 모허 절벽을 놓치고 가는 일은 정말 '멍청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모허 절벽에 와서 그냥 증명사진만 찍고 가려면 정말 '금쪽같은 해외여행의 하루'를 낭비하는 일이다. 중간 전망대에서 멀리 양쪽에 펼쳐진 절벽을 바라만 보다, 사진 몇 장 찍고 가려면 절대 갈 필요가 없다. 여긴 절벽 말고는 정말 아무것도 볼 것도 들을 것도 없는 곳이다. 여기에 왔다면 왕복 16㎞의 해변가 절벽을 천천히 걸어야 한다. 생각하기에는 혼자가 제일 좋지만 평소에는 서로 바빴던 가족들과 조용조용 얘기를 나누며 걸어도 좋고,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잡고 그냥 말없이 마음을 나누어도 좋다.
길은 그럴 수 있게 완만하다. 한쪽에는 끝도 없는 대서양이 펼쳐져 있고 다른 한쪽에는 이름 모를 들꽃이 핀 들판과 저 멀리에는 골웨이 만 해변가 마을이 있다. 하늘을 나는 새 소리와 귓가를 스쳐가는 바람 소리밖에는 안 들린다. 까마득한 아래 절벽을 잠시도 쉬지 않고 보채는 파도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평지 길을 걷듯 숨 가쁘지 않게 천천히 걸으면서 살아온 일과 앞으로 살아갈 일들, 그리고 그동안 내 삶을 다녀간 모든 사람들을 떠올리다 보면 결코 4시간이 어느덧 다 지나간다. 가끔 이런 조용한 시간을 가져 보는 일도 나쁘지는 않을 듯하다. 삶을 돌아보는 일을 반드시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만 해야 하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모허 절벽에 얽힌 영화 한 편이 있다. 내게는 정말 아껴 두는 명화들이 있다. 가끔 기회가 되면 보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아주 오래전에 본 영화라 찾아보고 싶긴 하지만 혹시 다시 보고는 실망해서 그때의 감동이 사라질까 두려워서 못 보는 영화도 있다. 그런 영화 중 하나가 '라이언의 딸'(1970년)이었다. 전설의 영화 '닥터 지바고' '아라비아의 로렌스' '콰이강의 다리'를 만든 거장 데이비드 린 감독의 명작이다. 많은 사람 입에 오르내리는 영화는 아니다. 그냥 정말 아는 사람만 아는 '분위기 만점의 영화'다.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전쟁에 얽힌 아일랜드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이다. 창백하고 파리하고 선병질적인 절름발이 영국군 소령 역의 주인공 크리스토퍼 존스의 치명적인 매력은 정말 대단했다. 그 매력에 마법처럼 이끌려 부나방 같이 달려들던 여주인공 사라 마일즈의 육감적인 모습도 화면을 태울 듯이 관객들을 압도했다. 펍에서 처음 만나 제대로 말도 못 나누어 봤는데도 서로에게 매료된 두 연인은 두 번째 만남에서 바로 세상의 관념을 뒤로할 정도로 격정적이었다. 그 영화 첫 장면에 바로 이 모허 절벽이 등장한다. 흡사 클로드 모네의 '양산을 쓴 여인'의 이미지와 똑같은 모습을 한 여주인공이 모허 절벽 위에 양산을 쓰고 나타난다. 갑자기 불어 본 바람에 양산이 날아가 나비처럼 아득한 아래로 떨어져 바다 위에서 떠도는 장면이다. 영화의 비극적인 결말을 암시하는 듯하다. 모허 절벽을 다녀 와서 아주 오래오래 미루던 숙제를 했다. 영화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새로운 감흥으로 다가왔다. 전혀 45년 전의 영화라는 생각이 안 들 정도로 그만큼 세련되었고 현대 감각으로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모허 절벽을 가실 분이라면 영화를 보고 가시라고 강추한다. 이웃을 잘못 만나 고통받았던 아일랜드인의 역사가 남의 일 같지 않아 가슴이 짠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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