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때 대구는 판소리 고장이었다… 비록 조선시대에 판소리 명창을 배출하지는 못했으나 판소리의 멋을 이해하고 즐길 줄 아는 '귀명창'이 많았던 고장이다… 전국의 여류 명창은 경상도 출신이 대다수였고, 박녹주는 영남 출신 선배… 이화중선 김초향 등과 후배… 박귀희 박초향 등과 함께 대구를 판소리의 고장으로 만든 주역이었다."('대구 이야기', 김종욱)
경북 선산 출신의 박녹주(1906∼1979)와 칠곡 가산이 고향인 박귀희(1921~1993)는 대구와 국악 인연이 깊다. 인간문화재 박녹주는 12세 때 선산 해평 도리사 부근에 머물던, 당시 '가신'(歌神) '가선'(歌仙) '가왕'(歌王)이라 불리던 명창 박기홍으로부터 판소리를 익히고 18세에 대구에서 배움을 다진 뒤 서울로 진출했다. 또 다른 인간문화재 박귀희도 8세에 대구에서 귀동냥으로 판소리를 시작했다. 박기홍의 4촌 동생 박지홍에게 가르침을 받다 서울로 갔고 뒷날 박기홍과 박녹주의 지도도 받았다.
판소리 하면 호남을 떠올리지만 일제강점기 시절 대구에는 전국 명창과 쟁쟁한 국악인이 몰렸다. 박기홍과 박지홍도 전남 나주에서 왔다. 대구에는 판소리 멋을 알고 즐기는 소위 귀명창이 많아서다. 당시 판소리 즉 국악은 망국의 아픔과 울분을 삭이는 훌륭한 위안이었다. 대구 귀명창들은 국악인의 든든한 힘이었고 국악인들은 제자를 잘 키웠다.
등하굣길에 도둑 수강하던 박귀희를 판소리 세계로 끌어들인 손광재도 그런 사람이었다. 박귀희는 뒷날 "소리를 잘하시는 분은 아니었지만 소리 안목이 높았던 분으로 귀명창이 아니었나…"며 회고록에서 그를 증언했다. 귀명창이 많던 시절, 대구에는 실력 있는 국악 스승이 즐비했고 여류 명창도 쏟아졌다. 박녹주와 박귀희는 그 대표적인 인물인 셈이다.
그러나 광복과 6'25 이후 무분별하게 수용한 서양 문물 특히 서양 음악으로 국악은 위기였다. 음악은 곧 서양 음악이었고, 우리 음악은 굳이 국악이라 해야 했다. 자리를 잃었다. 박귀희가 모든 재산을 넣고 전 국악인이 힘을 모아 설립해 오늘에 이른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가 노래(교가)에서 오죽했으면 '잃었던 국악을 다시 찾자'고 호소했을까?
넘치는 양악 물결 속에서 잃어버린 우리 음악을 찾아 지키고 생활 속으로 퍼뜨리기 위한 제1회 대구생활국악축제가 25일 대구서 열린다. 국악을 아끼는 동호인 행사다. 우리 음악이 빼앗긴 자리를 되찾고 이를 알고 즐기는 귀명창 많은 대구는 언제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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