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 사기와 뇌물, 그리고 쓴 약

입력 2015-10-20 01:00:05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주요 경제 범죄에 대한 최근의 법원 판결에 국민 눈길이 쏠린다. 우리 사회를 들었다 놨던 굵직한 사기 사건들이다. 15일 대법원은 사기성 기업어음(CP)을 발행한 혐의로 기소된 동양그룹 현재현 회장에 대해 징역 7년을 확정 판결했다. 서울중앙지법은 16일 사기 대출 혐의 등으로 심판대에 선 ㈜모뉴엘 박홍석 대표에게 징역 23년 형을 선고했다.

현 회장은 1조3천억원대의 사기성 CP와 회사채를 발행해 고객 4만여 명에게 피해를 입힌 혐의다. 1심에서 12년 형, 2심에서는 7년으로 처벌 수위가 낮아졌다. 법원이 일부 CP 발행을 무죄로 판단한 것이다. 반면 모뉴엘 사건에 내려진 징역 23년은 국내 경제사범 형량 중 가장 무겁다. 그런데 민심은 조금 다르다. 이런 인간은 평생 감방에서 썩게 해야 한다는 게 솔직한 법 감정이다.

박 씨에게 적용된 혐의는 모두 8가지다. 거래도 없는 컴퓨터를 수출한 것처럼 꾸며 보증을 받고 은행 10곳에서 3조4천억원을 대출 받았다. 은행을 상대로 사기를 친 것이다. 보증서를 믿고 돈을 빌려준 은행들은 5천400억원 넘게 손실을 봤다. 그는 무역보험공사 전'현직 임직원에게 돈을 먹였다. 사기 사건에 흔히 등장하는 맞춤 세트다. 쓴 약일수록 두껍게 당의(糖衣)를 입히듯 그는 돈으로 입막음을 하고 보증서를 받아냈다. 무역보험공사가 보증했다 날린 3천여억원은 결국 국민 세금으로 갚아야 한다.

2006년 검찰과 경찰은 조희팔의 최측근 강태용의 금융 다단계 사기를 수사하면서 주범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를 불구속 기소했다. 이듬해 대구지법은 1심의 징역형을 뒤집고 벌금형을 내렸다. 벌금 1천만원에 강태용은 간단히 풀려났다. 함께 법정에 선 조희팔 측근 '4인방' 중 1명을 빼고 모두 집행유예로 빠져나갔다. 흔히 조희팔 사건을 두고 '단군 이래 최대 사기 사건'이라고 한다. 사기의 주무대인 대구와 인천, 부산을 뒤흔들었지만 꼬리표에 걸맞지 않은 허탈한 심판이었다. 검찰도 상고하지 않아 사건은 마무리됐다.

조희팔 사건은 고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사탕발림에 속아 전국에서 수만 명이 하루 평균 100억원에 달하는 돈을 투자금 명목으로 밀어 넣었다가 날린 사건이다. 주범들은 중국으로 몰래 줄행랑을 놓았다. 피해액이 적게는 2조에서 4조원, 많게는 8조원이라는 주장도 있다. 사기 행각에 걸려들어 가산을 몽땅 잃고 자살한 사람도 10명이 넘는다.

뭐라 해도 조희팔 사건의 최대 피해자는 대구 시민이다. 피해자의 60%가량이 대구 사람이다. 남의 일처럼 태무심할 수도 있지만 그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게 조희팔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다. 예외 없이 사기 행각을 가리기 위한 뇌물이 곳곳에 뿌려졌다. 엄히 범죄를 다뤄야 할 검'경의 일부 간부에서부터 담당 수사관까지 뇌물을 먹고 뒷배를 봐주다 줄줄이 잡혔다. 공무원이 범죄 수익을 쌈짓돈처럼 나눠 쓴 꼴인데 뇌물이 어디로 흘러들어 갔는지 도통 감감하다.

조희팔의 오른팔인 강태용이 최근 중국에서 붙잡혔다. 도망친 지 7년 만이다. 그러자 검'경이 제각각 특별수사팀을 꾸리며 칼을 다시 갈고 있다. 하지만 이미 공권력에 대한 시민의 불신은 깊어질 대로 깊어진 상태다. 제대로 수사가 될까 의심한다. 비호 세력을 끝까지 밝혀내지 못할 것이라는 회의론도 나오지만 한비자의 말처럼 '국가라는 나무에 기생하는 해충'들을 모두 가려내기 전에는 끝난 게 아니다.

대구경찰청은 조희팔 사건의 핵심 인물인 전산실장 배상혁도 인터폴에 '적색 수배'할 계획이다. 그러나 수배할 대상은 여전히 차고 넘친다. 사건에 연루된 공직자들의 정체를 샅샅이 밝히는 게 검'경의 임무다. 법원 또한 법봉을 다시 두드려야 한다. 솜방망이가 아니라 무거운 방망이라야 한다. 몇 년 썩다 나오면 그것으로 끝이라면 경제사범은 계속 활개치고 우리 사회를 어지럽힐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당의를 완전히 벗겨 낸 쓴 약을 목에 넘길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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