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눈치와 둔치 사이

입력 2015-10-05 01:00:08

추석을 이틀 앞두고 예전에 같이 근무하던 교사 몇 분이 시지동에 있는 한 식당에서 모임을 가졌다. 대목 밑이긴 하나 지난여름 모친상을 당한 Y선생님을 위로차 마련한 자리다. 내가 저녁을 사기로 마음먹은 터여서 분위기가 살짝 익을 무렵, 화장실 가는 척 에둘러 계산대로 가서 카드를 내밀었다. 벌써 Y선생님이 들어오면서 바로 계산을 하셨단다. 위로를 해 드리고 싶었는데 눈치가 한발 늦었다. 나는 머쓱하기도 하여 "허허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더니…"라고 했다. 종업원이 웃으면서 "요즘은 나는 놈 위에 더 있는 데요." "그게 뭔데?" "나는 놈 위에 업힌 놈이요."

눈치 없기가 오늘이 처음일까. 불현듯 30대 후반이었던 나의 교사시절이 떠올랐다.

겨울방학을 앞둔 이른 아침이면 교무실 난롯가는 온갖 정보들이 정답게 오고 갔다. 어느 날 나도 모처럼 노변정담(爐邊情談)에 끼어들었다. 화제가 엄청 뜨끈뜨끈하긴 한 데 주인공이 누구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던 나는 선생님들의 입만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그때 한 선배 왈 "양호야, 양호실에 눈치약 좀 갖다 놔라. 최 선생 눈치약 좀 먹어야겠다". 일제히 배꼽을 잡고 웃었다. 나는 쥐구멍을 찾고.

이어서 하신 말씀 "하기야 교사라면 우리 최 선생 같아야지. 최 선생은 오로지 아이들 가르치는 일에만 관심이 있지". 이 말씀에 겨우 쥐구멍을 면하고 교실로 종종걸음을 쳤다.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학교 전체에 나만 모르고 쫘악 퍼진 모 교사의 연애담(?)이었다.

그 일로 인해 눈치약이란 용어가 처음 태어난 듯했다. 그 후로 이런 둔치가 교직생활을 잘할 수 있을까를 가끔 고민하였다. 다행히 선후배 교사들은 나를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때가 덜 묻었다고 격려해 주는 눈치를 발휘하셔서 위안이 되긴 하였다.

'거꾸로 생각하기'의 대가, 콜롬비아 화가 페르난도 보테로는 미인의 기준을 35-24-35의 8등신으로 보지 않았다. 다른 화가들과는 정반대로 풍선처럼 부풀린 여인의 인체를 비너스로 표현하였다. 역발상으로 인해 블루칩 화가의 대열에 오른 좋은 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웃음이 나온다. 그 당시 나에게 눈치약 제안을 하신 선배는 상당히 창의적인, 말하자면 거꾸로 생각할 줄 아는 분이셨나 보다. 나를 둔치로 대하지 않고 오히려 '교사답다'는 긍정의 메시지를 주셨으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도 때로는 거꾸로 생각해 보자. 눈치와 둔치의 간격이 얼마쯤 될까.

'느바기'란 신조어가 있다. 느리면서 바르게 기쁘게 세상을 걸어 보면 전에 미처 보지 못한 아름다운 것들이 많이 보인다. 사색의 계절을 맞이하면서 느바기로 바라본 소소한 일상에 눈치약 살짝 뿌려 맛깔스런 이야기 한 상 차려 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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