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은 대통령 다섯 명이 태어난 곳이다. 그중에 대통령 네 사람이 대구에서 났다. 경북고등학교는 대통령, 국무총리, 국회의장 그리고 대법원장 등을 키워낸 대한민국 유일의 학교이다. 다른 고장 사람들은 "그런 게 겨우 대구 자랑인가?" 하고 흰 눈으로 바라보며 이죽대기도 한다. 하긴 "경주 남산 돌이라고 다 옥돌이냐?"라는 말이 있다. 물론 남산 돌이 다 옥돌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 산에는 옥돌이 전혀 나지도 않는다.
대구 출신 중에 종교를 탄생시킨 교주도 몇 있다. 1824년 동해의 태양이 경북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를 점지하니 수운(水雲) 최제우가 탄생한다. 격동기 조선, 조정은 무능하고 서양인들은 무력과 종교로 설쳐대니 힘없는 민중의 한숨 소리만 천지를 진동했다. 그 시절 수운은 서양의 동점(東漸)에 대항해 동학을 창시했다. 동학은 교세를 넓혀 1905년에는 3대 교주 손병희가 천도교(天道敎)로 개명하고 항일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한다.
증산교의 강증산 선생, 원불교의 소태산 대종사 등도 수운의 사상을 전수받아 탄생하였다고 스스로 말한다. 이토록 동학은 한국에서 발생한 여러 종교의 뿌리이다. 동학농민혁명이 전라 지역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은 동학이 난 곳도 전라도 어디쯤인 줄로 안다. 전라도는 그 철학이 행동으로 나타난 곳이고 경주가 시작된 곳이다.
동해와 남산동의 정기가 대구에 충만하자 1938년 신호상이 태어난다. 그는 나중에 신정일로 개명해 아직도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정일 도령' 혹은 '정일 도사'로 부른다. 신정일은 대구에서 유명한 갑부였던 원오상회 창업주의 장손이다. 그는 경북대학교 법학과에서부터 동 대학원 철학과를 졸업할 때까지 삭발하고 각종 종교 관련 경전과 철학을 공부했다. 졸업 후에는 전국 명산과 대찰을 찾아다니며 인간의 본성을 화두 삼아 불철주야 탐구했다.
그는 1965년 12월 4일 대구 달성군 하빈면의 천불암(天佛庵)에서 드디어 정각묘득(正覺妙得) 한다. 또 하나의 종교가 대구에서 탄생한 것이다. 대오각성 후 그는 많은 설법을 하고 중생의 병을 치료했다. 이 무렵에는 성덕교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1967년 4월에는 정일회(正一會)라는 교명으로 문교부에 등록하고 다음해에는 성서에 교당을 만들고 교명을 정일교(正一敎)라고 붙였다. 1978년 2월 교명은 오늘날 불리는 한얼교로 바뀐다.
1988년 대표 경전 '한 얼 말씀'이 간행됐다. 인간 본성인 '내 얼이 한 얼이다. 본성인 나 얼을 깨닫고 만물의 본성인 한 얼과 하나가 될 때 인간은 고뇌에서 해탈할 수 있다'는 것이 교리의 요지이다. 한얼교의 신앙 대상은 한얼님이고 국조인 단군 성조를 개교조로 모신다. 그러므로 한얼교는 단군의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개국 이념을 바탕으로 현대철학과 원리로 인류를 인도하는 '바른 님의 교'라고 한다. 한얼교의 창교 정신은 한얼 정신이며 우리 민족 5천 년 정신사를 꿰뚫어 종과 횡으로 결실을 본 종교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공자님이 자신의 사상을 널리 펼쳐 만백성을 편안하게 하고자 천하를 주유하며 벼슬자리를 구하러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그릇이 작은 왕이 공자의 이론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고 안다고 해도 따를 능력이 없어 공자는 큰 벼슬을 하지 못하고 철학만 남기게 되었다.
한얼교 교주인 정일 도사도 앎을 실천해 중생을 제도하자는 생각은 공자와 유사했다. 하지만 그가 공자와 다른 점은 스스로 왕이 되어 자신의 철학을 펼치고자 하였다는 것. 1980년에는 한사상연구회 이사, 1981년에는 민족정신선양단체협의회 회장을 필두로 현실 세계에 돌입하고서 '한주의통일한국당'을 창당해 1987년과 1997년 두 번이나 대통령 후보로 나선다. 하지만 하늘의 점지가 이루어지지 않아 낙선의 고배를 마신다.
그러나 그는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교리를 전파해 나간다. '묘도경' '진공묘유론' '단군바른님' '얼'바름'행복' 등 수십 종의 저서를 발간해 교세를 확장한다. 저서 외의 행동으로는 '단군숭봉운동' '얼 바름 행복운동' '한 사상운동' 등의 활동을 한다. 그 결과 1970년부터 강화도 마니산 성지 순례단을 조직해 연례행사를 추진했는데, 1988년에는 10만여 명까지 참가할 정도로 교세가 확장됐다.
그는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 이후로는 정치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종교 활동 외에도 1991년에는 미국의 하버드대학교 케네디 국제정치연구소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중한론'을 발표했고, 1996년에는 이라크와 한국정부로부터 총 명예영사로 임명됐다. 1997년에는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서 '해리스 맨체스터 파운데이션'의 펠로로 임명됐다. 그는 중생을 구제하고자 혼을 불태우고서 1999년 4월 5일 선종한다. 다비하였을 때 진신사리와 함께 진모사리 그리고 치사리가 28과나 나왔다고 한다. 정일 도사는 니르바나의 세계로 떠났지만, 오늘도 그의 한얼교는 민중의 횃불이 되어 찬란하게 타고 있다.
정일 도사보다는 좀 늦은 1941년 2월 11일 또 한 사람의 교주 유병언이 대구에서 태어난다. 그는 일본 교토에서 1945년 고향인 대구로 귀향한다. 그는 성광고를 졸업하고 미국 딕 욕의 성경학교를 수료하며 신앙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기독교 계열 종파인 '기독교복음침례회'를 창종하고는 교세 확장과 더불어 세모그룹을 창설해 정일 도사처럼 종교와 사업을 병행했다. 그러나 지난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서 그해 6월 12일 이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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