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의 문중이야기]<15·끝> 화순 최씨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한 삶

입력 2015-08-25 01:00:05

전 재산 기부 인재 양성한 여걸 최송설당…서슬 퍼런 독재 맞선 언론인 최석채 선생

황악산 직지문화공원 끝자락에 자리한 국제언론인협회(IPI) 세계언론자유영웅 50인으로 선정된 몽향 최석채 선생 기념비와 그의 사설
황악산 직지문화공원 끝자락에 자리한 국제언론인협회(IPI) 세계언론자유영웅 50인으로 선정된 몽향 최석채 선생 기념비와 그의 사설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를 기록한 사설비. 최원덕 화순 최씨 김천화수회 회장이 둘러보고 있다. 정운철 기자 woon@msnet.co.kr
평생 모은 전 재산을 기부해 김천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한 최송설당 동상, 현 김천고등학교에 위치한 최송설당 동상은 2012년 문화재청 등록(근대) 문화재 제496호로 지정됐다. 정운철 기자 woon@msnet.co.kr
평생 모은 전 재산을 기부해 김천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한 최송설당 동상, 현 김천고등학교에 위치한 최송설당 동상은 2012년 문화재청 등록(근대) 문화재 제496호로 지정됐다. 정운철 기자 woon@msnet.co.kr

화순 최씨 문중 이야기 마지막 회는 몰락한 가문에서 태어나 어렵게 모은 전 재산을 기부해 육영사업을 펼친 최송설당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를 실천한 삶을 담아낸다. 또 권력에 굴하지 않고 정론'직필을 실천하며 언론인의 자존심을 지킨 몽향 최석채의 생도 더듬어봤다.

◆전 재산 헐어 육영사업을 펼친 최송설당

"길이 사립학교를 육성해 민족정신을 함양하라. 잘 교육받은 한 사람이 나라를 바로잡고 잘 교육받은 학생 한 사람이 동양을 편안하게 할 수 있다. 마땅히 이 길을 따라 지키되 부디 내 뜻을 저버리지 마라."(永爲私學 涵養民族精神 一人邦定國 一人鎭東洋 克遵此道 勿負吾志)

전 재산을 기부해 김천고등보통학교(현 김천중'김천고)를 설립한 최송설당(崔松雪堂'1855~1939)은 만 84세이던 1939년 6월 16일 오전 10시 40분, 마지막 당부를 끝으로 파란만장했던 생애를 접고 세상을 떠났다.

학교장(學校葬)으로 진행된 장례식에는 정무총감과 학무국장, 각 도지사 등 전국 각계각층의 인사가 조화를 보내왔고,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유력 일간지들도 다투어 장례식을 보도하고 특집을 연재하기도 하며 그녀의 공을 기렸다. 몰락한 집안의 딸로 태어나 일제강점기란 질곡의 세월을 살아온 그녀의 삶이 이처럼 세상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기 때문이다.

최송설당은 1855년(철종 6년) 김산군 군내면(현 김천시 문당동)에서 최창환(崔昌煥'1827~1886)과 어머니 정옥경(鄭玉瓊) 사이 세 딸 중 맏이로 태어났다.

당시 최송설당의 집안은 '역적의 집안'으로 몰려 있었다. 최창환의 조부 최봉관은 1811년 평안도에서 부호군 벼슬을 하던 중 홍경래의 난에 제대로 대항해 싸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돼 옥사했고, 맏아들 최상문을 비롯한 4형제는 전라도 고부로 유배됐다. 유배지 고부에서 최상문은 최창환을 낳았고 유배지의 고된 삶을 견디다 못한 최창환은 친척들이 살고 있던 김천으로 이주해 왔다. 멸문에 버금가는 벌을 받은 최창환은 변변한 전답도 없어 작은 서당을 운영하고, 그의 부인은 삯바느질을 해가며 세 딸을 키웠다.

아들이 없던 최창환은 가문의 신원(伸寃'역적으로 몰린 가문의 원한을 푸는 일)을 최송설당에게 맡기고자 한학과 한글을 가르쳤다. 그녀가 남긴 문집 '최송설당집'에 실린 한시나 가사는 '조선의 마지막 여류시인'이라고 불릴 만큼 빼어났다.

마흔두 살까지 최송설당이 김천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최송설당은 삯바느질과 농사로 땅을 불려 나갔다고 회고했지만, 장사를 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다만 1894년 상경하기 전 최씨 집안은 상당한 재산을 축적해 김천에서 내로라하는 부자가 됐다.

◆송설교육재단을 세우다

부를 축적한 그녀는 가문의 숙원을 해결하고자 서울로 향했다. 상경한 최송설당은 봉은사를 찾아 기도하다가 고종황제의 총애를 받아 영친왕을 낳는 엄 상궁의 동생과 인연이 닿게 된다. 이 인연으로 최송설당은 입궐해 영친왕 이은의 보모가 된다.

고종과 엄 귀비의 신임을 받던 최송설당은 1901년 고종으로부터 '홍경래의 난으로 인해 몰적(沒籍)된 화순 최씨 가문의 죄를 사면하고 복권하라'는 어명을 받는다. 가문의 오랜 염원을 풀어낸 것.

하지만 최송설당은 궁에서 나와야 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이 퇴위하고 이토 히로부미는 교육을 구실로 황태자 영친왕을 일본으로 데려갔기 때문이다. 11년간의 영친왕 보모 생활을 마치고 궁을 나온 최송설당의 재산은 처음 상경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나 있었다. 이렇게 많은 재산을 모은 경위는 명확하지 않지만 궁에서 받은 봉급도 적지 않았고, 궁에서 나올 때 엄 귀비가 많은 토지를 하사했다고도 전한다.

궁에서 나온 최송설당은 가문을 바로 세우는 데 힘을 쏟았다. 화수회를 열고 종친에게 토지와 학자금을 주었으며, 조상의 묘소를 찾아 손질하고 석물을 세웠다.

더불어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최송설당은 모은 재산을 불교계와 빈민을 위해 아낌없이 기부했다. 이렇듯 어려운 이들을 위해 많은 기부를 했어도 1930년 75세 되던 최송설당에겐 30만원 상당의 엄청난 재산이 남아 있었다. 삶을 정리하던 최송설당은 고민 끝에 1930년 2월 23일 자로 김천고등보통학교 설립을 결정하고 전 재산 30만1천200원을 희사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당시 쌀 한 가마가 13원 정도였으니 30만1천200원은 요즘 화폐 가치로 치면 약 300억원에 달한다. 당시 조선'동아일보 등에는 그녀가 고향 김천에 학교 설립을 위해 전 재산을 내놓았다는 기사가 일제히 실렸다.

최송설당의 기부에도 식민지 정책에 걸림돌이 되는 것을 경계한 총독부로 인해 김천고보 설립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실업교육을 같이 한다는 조건으로 설득해 1931년 2월 마침내 송설교육재단 설립을 인가받았다. 그리고 1939년 세상을 뜰 때까지 최송설당은 남아있는 모든 재산을 김천고보에 기부하고, 그녀가 자식처럼 여긴 김천고보 학생들을 항상 내려다볼 수 있는 학교 뒤 송정에 영면했다.

◆집권당의 부패와 독재에 맞선 직필(直筆) 최석채

"은퇴한 권력자는 화려한 영광의 기억이, 경제인은 은행계좌에 재산이 남지만, 신문인은 기사 스크랩과 자존심 외엔 남는 게 없다. 언론인이 자존심을 버리면 언론에 대한 사명감도 없어지고, 언론의 권위도 떨어지는 것이다." 몽향(夢鄕) 최석채(崔錫采'1917~1991)가 생각하던 언론관이다.

매일신문 편집국장'명예회장, 조선일보 편집국장 등을 지낸 최석채는 2000년 5월 국제언론인협회(IPI)가 창립 50주년을 기념해 선정한 '언론자유영웅(Press Freedom hero) 50인'에 뽑혔다.

최석채는 1917년 김천 조마면 신안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김천에서 보낸 그는 1942년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 법학부를 졸업했다. 동경서 고학을 했던 최석채는 학비를 벌기 위해 잡지 '법제'(法制)의 편집기자로 언론과의 인연을 맺었다.

광복 후 1946년 3월 대구에서 발행한 잡지 '건국공론'(建國公論)의 편집부장과 '경북신문' 편집국 차장(1946년 7월), '부녀일보'(婦女日報) 편집국장(1947년 12월)을 차례로 맡았다. 건국 후에는 경찰관이 되어 성주'문경'영주 경찰서장 등을 역임하다 6'25전쟁 중 부산에서 일어난 5'26 개헌 파동 소식을 접하고 사표를 냈다.

최석채는 1954년 대구일보 부국장으로 다시 언론인의 길을 걷는다, 이듬해 2월 대구매일신문사로 옮겨 편집국장이 됐고, 6개월 후 주필직을 맡았다. 그해 9월 최석채는 자유당 정권이 정치행사에 자주 학생을 동원해 학업에 지장을 초래하자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사설로 신랄하게 비판했다.

아래는 최석채가 쓴 1955년 9월 13일 자 매일신문 사설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 중 일부다.

'이즈음에 와서 중'고등학생들의 가두행렬이 매일의 다반사처럼 되어 있다.(중략) 특히 우리가 괴이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학교 당사자들의 회의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관청의 지시에 의하여 갑자기 행해졌다는 것을 들을 때 고급 행정 관리들이 상부 교제를 위한 도구로 학생들을 이용하고(중략) 마치 자기네 집안의 종 부려 먹듯이 공부 시간도 고려에 넣지 않은 것을 볼 때(중략) 우리들 학부형 입장으로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하략)'

당시 임병직 주UN 대사가 대구 동촌비행장에 도착할 것에 대비, 당국이 환영행사를 위해 수백 명의 중'고생들을 연도에 도열시켰다. 하지만 비행기가 연착한 데다 늦더위로 학생들이 쓰러지는 사태가 발생하자 최석채는 이를 비판하는 사설을 실었던 것이다.

◆탄압에도 굴복하지 않은 참언론인

사설이 실리고 이튿날인 오후 4시 25분쯤 대구 태평로에 있던 매일신문사에 곤봉과 해머를 든 괴한 20여 명이 난입했다. 이들은 욕설과 고함을 지르며 사무실과 공장 내부를 닥치는 대로 파괴했다.

괴한들은 만류하던 직원들을 구타하고 지방으로 발송하려고 준비 중이던 신문을 빼앗았다.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웠던 듯 피해는 매우 컸다. 백주에 신문사가 테러를 당한 것이다. 최석채도 무사하지 못했다. 그는 논설의 내용을 북한의 평양방송이 인용해 선전에 사용했고 적성감시위원단의 사기를 높여줘 국헌을 문란케 했다는 혐의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기소됐다.

그러나 법원은 1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이어 고법과 이듬해 5월 8일 대법원 전원 합의로 무죄가 확정됐다. 최석채의 용기 있는 투쟁이 폭력을 앞세운 권력을 굴복시킨 의미 있는 사건. 한국 정치사와 언론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당시 최석채가 쓴 매일신문 사설은 전국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켜 발행 부수가 몇 개월 만에 배로 증가할 만큼 진가를 높였다. 그러나 필화를 겪은 그는 결국 매일신문을 떠났다.

최석채는 1959년 10월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조선일보에서 그가 쓴 사설 '호헌구국운동 이외의 다른 방도는 없다'는 단순한 사설이기보다는 격문이었다. 이 사설은 4'19의 도화선이 됐다는 평을 받았다. 최석채는 5'16쿠데타 이후에는 무(無)사설 12일이라는 보기 드문 저항을 하기도 했다. 또 1964년 언론 파동 때 언론윤리법 반대투쟁위의 핵심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담판을 지어 악법을 유보한 것을 평생의 자랑으로 여겼다.

최석채는 1971년 12월 국가보안법이 날치기 통과되자 '신문은 편집인의 손에서 떠났다'고 개탄하며 조선일보 주필 자리를 떠났다. 이후 그는 말년에 매일신문 명예회장으로 복귀해 1981년부터 6년간 '몽향칼럼'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다 타계해 고향에 묻혔다.

공동기획 김천시

김천시사

대간 숨을 고르다, 황악(박용우)

최송설당의 삶과 민족교육 그리고 문학(송설당 기념사업회)

디지털김천문화대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화순 최씨 대동세보

최동현 화순 최씨 김천화수회 고문

최원덕 화순 최씨 김천화수회 회장

최원봉 화순 최씨 김천화수회 부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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