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아의 세상을 비추는 스크린]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입력 2015-08-14 07:51:39

'88만원 세대' 실성한 성실女 괴물 되는 웃픈 현실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 작품, 30대 젊은 감독의 데뷔작, 총제작비 2억원, 주연배우 이정현의 재능기부 노개런티 출연, '생계밀착형 코믹 잔혹극'이란 장르를 내세우는 저예산 독립영화다. 한국영화의 평균제작비가 50억원 내외인 현실에서 평균제작비의 4%로 완성되었다. 스타 마케팅과 규모의 경제학이 흥행공식이 되어버린 한국영화산업 현장에서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 자못 궁금해진다. 이 영화는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비의 준말) 면에서 매우 출중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5포 세대' '88만원 세대'라고 지칭되는 현 젊은 층의 생존에 대한 고민을 담는데, 이를 쿨하게 받아들이다가 소름 돋는 공포로 마무리하면서 현시대의 불안감을 반영한다. 영화는 판타지 장르 안에 현실의 불안과 공포를 빼곡히 채워 넣는다. 로맨스, 코미디, 호러, 스릴러가 뒤섞여 있다. 현실의 고난이 리얼리즘 방식이 아닌 판타지 언어로 표현되다 보니, 한발 멀찍이 떨어져서 관망하며 키득거릴 수 있는 여유를 준다. 끝까지 가면 갈수록 마음 깊은 곳에 서늘한 아픔으로 남게 되지만, 영화를 따라가는 과정 내내 카타르시스와 함께 묘한 쾌감이 느껴진다. 아마도 먼 훗날 2015년 젊은이들의 초상을 보여주는 텍스트로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를 꼽게 될 것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수남(이정현)이라는 한 성실한 여학생이 있다. 그녀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엘리트의 삶을 꿈꾸면서 온갖 자격증 최연소 최다 보유자 타이틀을 꿰찬다. 하지만 컴퓨터가 도입되며 그녀의 노력은 물거품이 된다. 타자, 주산 같은 걸 아무리 잘 해봤자 좋은 회사에 취직하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조그만 공장에 취직을 하고, 그 공장에서 규정(이해영)을 만나 결혼을 하고 살 집을 마련한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고단하기만 하다. 불구가 된 남편을 대신해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투잡, 스리잡을 하며 열심히 일하지만 남는 건 빚뿐이다. 이런 수남에게 단 한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 바로 재개발. 수남은 재개발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맞서 주민들의 사인을 받으러 다닌다.

수남은 재개발이라는 기사회생의 일대 기회를 놓고서 각자의 이익에 따라 대척점에 놓이게 되는 마을 사람들과 인생을 건 결전을 벌인다. 구청 공무원, 심리상담사, 부녀회장, 퇴역 군인, 가게점주 등 마을에서 한가락씩 하는 사람들과 만날 때마다 가진 게 없는 성실하기만 한 젊은 여자는 자꾸 늪에 빠지는 듯하다. 수남이 사는 서울 어느 달동네는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타인에 대한 착취를 아무렇지도 않게 허용하는 우리 사회의 압축공간으로 그려진다.

수남은 생계를 위해 익힌 손재주를 죽지 않기 위해 사용하기로 한다. 하나하나 어른들을 죽여 나가며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괴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남편과 행복하게 살고 싶어 죽이는 행위는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벼랑 끝으로 서민을 몰아넣는 사회는 결국 끔찍한 행위를 초래하고 말 것이라는 섬뜩한 경고로 다가온다. 웃고 있자니 슬프기 그지없다.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변주로, 영화는 앞으로 가면 갈수록 미궁에 빠지는 현실을 풍자하는 블랙 코미디이다. 열심히 일할수록 빚은 늘어가고 성실하게 살수록 더 가난해져서 실성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미친 세상. 내 탓도 아니니 세상을 향해 무차별 복수를 감행하는 수남이 한없이 가련하다. 그렇지만 결국 복수도 허망하게 끝이 날 것임을 우리 모두가 안다.

영화는 윤리와 여성 이슈라는 문제에서 논쟁거리가 될 만하다. 끝없이 남자에게 사랑을 바치는 순진무구한 여성이 잔인한 범죄자가 된다는 이야기는 이전 많은 영화들에서 되풀이되어 온 소재로 페미니즘적 논쟁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하지만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남녀 성별의 문제보다는 세대 간 전쟁을 통해 이득을 취해온 불성실한 사회를 겨냥한다는 점에서 적극적인 사회 반영물이다.

주연배우 이정현은 영화의 매력 중 상당 부분을 책임진다. 순진한 얼굴로 잔혹한 행위를 저지르는 아이러니를 비현실적이면서도 과장되지 않게 연기한다. 여고생 때 출연한 '꽃잎'(1996) 이후 비로소 자신의 대표작을 가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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