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사만어] 죽음의 약속

입력 2015-08-05 01:00:00

빚과 관련된 경제 용어 중에는 어원이 섬뜩한 것들이 있다. '담보'라는 의미의 '모기지'(mortgage)는 '죽음(mort)의 약속(gage)'이란 말에서 유래했다. 죽을 때까지 채권자에게 제 삶을 저당 잡힌다는 의미쯤 되겠다. '채권'이라는 뜻의 '본드'(bond)도 묶음, 노예 신분, 강제노역을 뜻하는 'bondage'에 어원을 두고 있다.

대출이 주요 영업수단인 금융자본가의 입장에서는 부채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희석시킬 필요가 있었다. 적자 재정에 대한 거부감을 피하기 위해 정부도 비슷한 태도를 보인다. "경기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기채(起債)를 하겠다"는 정부의 발표는 중립적으로 들리지만 이는 "지금 당장 아쉬워서 빚내서 쓰는 것은 우리지만, 갚는 것은 후손 몫"이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다. 미래에 빚 고지서를 받아들 후손들로부터 "조상 잘못 뒀다"는 원망을 들을지도 모르겠다.

더 나아가 민간금융조직이 정부 기관인 척하는 경우도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Federal Reserve Board of Governors)가 그렇다. FRB는 '연방'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정부기관이 아니다. FRB의 실제 주인은 미국의 주요 민간은행들이며 그 지분은 극비에 부쳐져 있다. FRB가 펴 온 '양적 완화'(quantitative easing)도 용어만 보면 마치 부당한 규제를 푸는 착한 정책처럼 들리지만, 돈을 엄청나게 찍어 시중에 풀겠다는 선언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프레임(정신적 틀)을 장악한 이가 세상을 지배한다. 머리가 비상한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는 경제계는 특히 이런 프레임 싸움에 능하다. 국내 최악의 환경오염사고인 2007년 해양 기름유출 사고에서 원인 제공자인 '삼성'이란 단어가 빠지고 '태안 기름 유출 사고'라는 용어가 일반화된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정부는 8'15광복 70주년을 맞아 경제사범에 대한 사면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재벌 일가 사면을 위해 동원되는 프레임은 역시나 '경제 살리기'와 '국민 통합'이다. 국민감정은 부정적이다. 더구나 한국기업인지, 일본기업인지 헷갈리는 한 재벌 일가의 막장 분쟁마저 터진 마당이 아닌가. 법의 심판을 받은 재벌 총수를 사면한다고 경제가 살아나고 국민 통합이 이뤄질까. 그렇다고 생각하는 위정자가 있다면 부패와 탈세로 침몰한 그리스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이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