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짓고 배짱 편해…아이 울음·여자 수다·글 읽는 소리 나는 신천지 기대
올해 49살. 전라도 한 사나이가 일을 저질렀다. 3년 전 깊은 산속에 도자기 가마를 만들고 집을 짓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왕이면 같이 살자고 했다. 비가 오면 북 치고 장구 치며 놀고, 날씨 좋을 때는 논에 나가 농사짓는 꿈 같은 마을을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
지난해부터 집이 들어섰다. 모두 12가구. 지금은 여섯 가구가 살고 있다. 올해 말까지 10가구가 될 예정이다. 이 마을의 촌장격인 김형규 씨(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 그는 20대에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삶의 태도가 바뀌었다. 절집으로 들어가 5년을 머리 깎고 살다 우연히 마주친 가마의 황홀한 불빛에 빠져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도자기를 빚듯 신천지를 만들어가고 있는 그를 만나기 위해 외딴곳, 전라남도 청림마을을 찾았다.
-이런 곳에 마을이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몇 년 전 꿈에 넓고 아름다운 바위를 봤다. 기분이 너무 좋아 그곳을 찾아 나섰는데 꿈에 본 그 바위가 현실에 존재했다. 거기에 집을 짓고 도자기 가마를 만들자 지인들이 찾아들었다. 같이 모여 살아보자고 해서 마을이 생겼다.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깊은 산 속에 마을이 만들어진 이유다.
-동호인 주택단지인가.
▶목적이 있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풀씨가 떨어져서 봄 산을 이루듯 자연발생적으로 생겼다. 뭘 하자는 것도 없다. 단지 서로를 너무 깊게 알려 하지 말고 각자 살고 싶은 방식으로 살아보자는 식이다. 단 한 달에 한 번 모두가 모여 마을 입구의 가시넝쿨을 걷어내고 길을 정리하는 울력을 한 다음, 솥을 걸어 음식을 해먹고 있다.
-마을 주민으로서 지켜야 할 몇 가지 규칙이 있다고 들었다.
▶서로 간섭하지 말기다. 각자 일하고 먼 곳에서 손이나 흔들며 인사하고 웃는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자고 했다. 서로를 지나치게 간섭하지 말며 관심 보이지 않기다. 또 한옥을 지어야 한다는 규칙을 정했다. 서양식 건물이 싫어서가 아니라 한옥과 양옥이 함께하면 마을의 분위기를 해칠 것 같아 그렇게 정했다. 모두들 흔쾌히 응했다.
-모두 몇 가구인가.
▶12가구다. 아이들 교육문제 때문에 현재는 여섯 집이 살고 있다. 올해 내로 10가구가 될 것이다. 서울 등 전국에서 온 사람들이다. 재작년에 집을 짓고 작년에 입주를 시작했으며 지금도 공사를 하고 있다.
-은퇴하고 오신 분들인가.
▶아니다. 환갑을 넘긴 사람은 없다. 대개가 50대 초반이다. 나이가 너무 많으면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하다. 모두들 독자적으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마을 주민들은 어떻게 생활하고 있나.
▶주로 콩농사와 논농사를 짓고 있다. 농사지어 먹고 남으면 팔아서 생활하고 있다. 자연에 가까운 생활을 추구한다. 마음 편하고 배짱 편한 생활을 꿈꾸는 사람들이다. 생산적인 놀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농사를 짓기가 쉽지 않을 텐데.
▶농사를 짓는 목적은 철을 알고 자연의 순리를 알아가기 위해서다. 봄 여름 가을 계절의 타이밍을 알고 자연과 더불어 철 들려고 농사를 한다. 벼농사를 짓고 고추농사와 콩을 조금씩 짓는 정도다. 이 마을 주변의 농민들과 소통을 할 수 있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어떤 마을을 꿈꾸고 있나.
▶3가지 아름다운 소리가 났으면 한다. 젊은이들이 많이 와서 아기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 우물가에 여자들의 웃음소리와 수다가 떠나지 않길 원한다. 세 번째는 밤마다 글 읽는 소리가 났으면 한다. 하루아침에 되지는 않겠지만, 시나브로 이루어지고 있다.
-올해 마을을 위해 계획하고 있는 것은.
▶공동우물을 만들 생각이다. 한 우물을 먹어야 비로소 한마을 사람이다. 우물가에 모여 여자들은 수다를 떨고 남자들은 아낙들의 수다를 위해 멋진 앵두나무를 심어줄 계획이다.
-집을 짓는 데 비용은 어느 정도 들었나.
▶천차만별이다. 적게는 6천만원, 많게는 3억원 정도다. 원하는 삶에 따라 집의 크기나 모양이 다르다. 산속이라 전기도 끌어와야 할 만큼 힘든 여건이었다.
-한 사람의 힘이 크다. 당신이 그런 힘을 가지게 된 동기가 있는가.
▶굳이 이야기하자면 20대 초반에 있었던 사고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릴 즈음 친구들과 외설악에 갔다. 산행 중 발을 헛디뎌 20m 아래로 떨어졌다. 아파트 8층 높이다. 운 좋게 오른쪽 다리가 나뭇가지에 걸려 살았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이 일을 겪은 후 생각이 바뀌었다. 사고 이후 넉넉한 마음과 여유로운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 이 마을을 만든 힘이 된 듯하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많은 변화가 있었겠다.
▶살아있다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바람이 일렁거려도 즐거웠고 미운 친구도 예쁘게 보였다. 그 당시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았으나 이것 또한 쓸모없다는 걸 알았다.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확실한 오늘을 날려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오늘을 충실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인가.
▶그렇다. 이제 와 생각하니 오늘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일도 생각해야 되겠더라.(웃음) 가장으로서 책임 때문이었다.
-절에는 어떻게 들어가게 됐나.
▶대단한 이유는 없다. 사고가 있은 후 삶의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다. 나도 모르게 풍류를 즐기는 선비였던 할아버지의 삶을 흉내 내고 있었다. 북도 치고 대금도 불고 그렇게 살아가다 절집 문턱으로 흘러들게 됐다. 25살 때였다. 대금을 등허리에 짊어지고 절로 간 것이, 그 길로 눌러앉게 됐다. 자연이 좋고 마음이 편했다.
-5년 만에 환속했다.
▶절에 딸린 도예공방이 있었는데 어느 날 우연히 가마의 불빛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겼다. 세상에 이런 색이 존재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판타지였다. 그토록 거대하고 아름다운 불을 가마 안에 가둘 수 있다는 것이 경이로웠다. 가마의 불이 내 가슴으로 옮겨와 불이 되어버렸다. 그 불에 취해 하산하고 고향인 장성에 와서 도자기를 공부했다.
-도자기 공부는 잘 됐나.
▶10년쯤 공부를 하다 보니 겨우 백자의 선이 보였다. 잊지 못할 스승이 있었는데 이분은 어디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좋은 흙이 있으면 거기에 움막을 짓고 가마터를 만들어 생활하며 도자기를 구웠다. 그분으로부터 도자기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불과 흙과 물과 바람과 나무의 성질을 배웠다. 저절로 음양오행을 터득했고, 풍수를 알게 됐다.(스승을 닮아 그도 혼자서 깊은 산 속에 방 하나를 짓고 가마를 만들어 도자기를 굽기도 했다)
-장작 가마를 고집하고 있다. 그 이유가 있나.
▶장작 가마는 불의 강도나 나무에 따라 도자기 색이 조금씩 다르게 나온다. 그 맛은 전기나 가스 가마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도자기의 매력이라면.
▶불때기다. 많은 사람들이 가마 속의 불을 한번이라도 보았으면 한다. 태양의 한 부분을 가까이서 보는 듯한 황홀함이 있다. 또 가마는 까탈스러운 여자와 같아서 살살 달래가며 비위를 맞춰야 한다. 도자기를 만드는 재미는 가마와 사랑을 나누는 재미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도자기를 넣고 50시간 불을 때고 기다리는 모습이 생명의 탄생과 흡사하다.
-지금까지 전시회를 하지 않았다.
▶벌이 꽃을 찾아야지, 꽃이 벌을 찾아다닐 수 없는 것 아니냐. 하하, 농담이다. 솜씨가 부족한 것이 가장 큰 이유다. 도자기를 일 년에 두 번 구우면 30년을 구워도 60번밖에 되지 않는다. 그 정도로는 제대로 된 도자기를 만들 수 없다. 도자기는 적어도 3대가 지나야 한다. 1대는 좋은 가마를 만들고 좋은 흙을 모으면서 토대를 만들어야 하고, 2대는 열심히 작업을 해야지만, 3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빛을 발할 수 있다. 나는 토대를 만드는 작업을 열심히 할 뿐이다.
-아들만 둘이다. 아버지의 도자기 작업을 물려받길 원하나.
▶어느 날 둘째가 물었다. 잘 살지도 못하는데 왜 그렇게 힘들게 일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남들처럼 해외여행도 못하면서 몇 날 며칠 잠도 자지 않고 가마에 불을 지피느냐고 말이다.
-어떻게 대답했나.
▶'도자기 작업은 나를 갈고닦기 위해 하는 것이다. 그 속에 즐거움이 있다. 너도 그런 즐거움을 맛볼 수 있으면 좋겠다. 좋은 학교에 들어가 출세하는 것은 반대다. 휴가를 얻어 즐거워하는 그런 삶을 살지 마라. 한 판 잘 놀다 가야 한다. 남이 만들어 놓은 길을 걸어가면서 네 길인 양 그렇게 걸어가지 마라'고 했다. 다행스럽게 아이가 도자기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싶다.
-7년간 매일 관속에서 자는 '관수행'을 했다. 이유가 무엇인가.
▶도자기를 빚으면서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날이 있었다. 그때 장의사에게 부탁해 관을 짰다. 매일 밤 관에 들어가서 오늘의 나를 죽였고 나를 없애는 과정을 되풀이했다. 관 속에서 하루를 반성하고 자신에게 질문을 했다.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느냐고.
-왜 관수련을 그만두었나.
▶7년을 하고 이른 봄 관짝을 가져다가 가마에 넣었다. 관을 태우면서 이 세상이 내 관이려니 하며 살고 있다.
-당신의 인생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기다림이다. 도자기를 만드는 일도 석 달 정도 걸리는 기다림의 작업이다. 어릴 때 할아버지를 위해 먹을 갈면서 천천히 갈면 졸리고 빨리 갈면 옷을 다 버렸다. 기다리며 때를 위해 참는 법도 배웠다. 나는 '기다리기 대장'이다.
김순재 객원기자 sjkimforce@naver.com
사진 강습현 focus1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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