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通] '가위손'의 수구초심 헤어디자이너 한율 씨

입력 2015-08-01 01:00:00

서울에서의 성공, 유럽 유학의 꿈…그 마지막은 역시 고향 대구였죠

"대구에 품격 있는 미용문화를 정착시키고 싶어요." 도나플로르헤어 한율 원장이 고객의 머리를 다듬고 있다. 성일권 기자 sungig@msnet.co.kr

보통 사람의 머리카락은 약 10만 개. 하루에 0.3㎝씩 자라고 이를 모두 합치면 1년에 13㎞가 된다고 한다. 이 10만 개의 조합에 의해 헤어스타일이 결정된다. 가위와 빗의 놀림에 의해 머리 모양이 결정되고 이 모든 과정에 헤어디자이너가 있다.

이 '복잡한 유희'에 뛰어들어 17년 동안 '시저스 쇼'를 펼치는 한 헤어디자이너가 있다. 그리 길지 않은 연륜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무척 다양한 이력이 그 안에 녹아 있다.

서울 청담동 '제니하우스' 디자이너,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헤어 전담 스태프, 영국 캔터베리칼리지스쿨 유학 등 범상치 않은 경력이 그의 이력서 칸칸을 장식하고 있다.

이 화려한 스펙의 헤어디자이너가 2007년 대구에 둥지를 틀었다. 연예의 중심 서울에서, 세계 헤어스타일의 본산 유럽에서 대략 꿈을 이루고 이젠 고향에서 봉사하고 후배들도 키워보자는 소박한 꿈에서였다.

복지시설 미용봉사, 미용사 조합서 디자인'커트 강의, 숍 운영에 분주한 한율(41) 원장을 상인동 '도나플로르'에서 만났다.

◆한국 문화'미용의 중심 청담동 입성

군 제대 후 미용실을 운영하던 한 원장에게 일상은 무료했다. 친척의 권유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삶의 뚜렷한 목표도 지향도 없이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했어요. 그때 스치는 생각이 기왕 가위를 잡았으니 서울로, 그것도 강남으로 가보자는 것이었어요. 하던 일을 모두 접고 청담동으로 들어갔어요. 어렵사리 한 숍에 취직이 되었고 그때부터 최말단 스태프 생활이 시작되었죠."

강남숍의 말단은 고된 노역의 연속이었다. 오전 7시부터 밤늦게까지 청소, 머리 감기기, 정리정돈 같은 잡무가 하루 종일 밀려들었다. 서울에서 말단 미용사의 로망은 '고정석'을 갖고 자기 단골을 관리하는 일이다. 구석 자리 코너를 얻는 데 5년 이상 걸리고 이렇게 힘들게 얻은 자리도 단골이 없으면 도태되고 만다.

대구에서 갈고 닦은 한 원장의 실력은 까다롭기로 소문난 강남 사모님들의 눈에 들었다. 금방 중견의 자리로 올라서며 단골을 늘려 갔다.

자기 헤어스타일을 찾지 못한 손님들도 한 원장에게 오면 금방 해결이 되었다. "가끔 손님들이 잡지 사진을 오려 와서 똑같이 해달라는 분들이 있어요. 보통 헤어스타일은 두상(頭相)과 머릿결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신 거죠. 충분히 설명을 해드리고 최적의 조합을 만들어 드리면 손님들이 아주 만족해하십니다."

◆원빈과의 인연, 연예계 인맥 연결

톱스타 단골을 거느리고 월매출 수천만원…. 강남의 미용사라면 누구나 꿈꾸는 성공 신화다. 한 원장의 대박 신화는 뜻밖의 일에서 실마리가 풀렸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배우들 머리 디자인을 그가 속해 있던 '제니하우스'에서 맡게 된 것이다.

"첫 미팅 때 출연배우들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장동건, 원빈, 이은주 같은 톱스타들을 보고 과연 제정신으로 저 배우들의 머리를 만질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죠."

이런 설렘도 잠시 한 씨는 곧바로 영화 현장에 투입되었고 2년 동안 전국의 촬영 현장을 뛰어다니며 배우들의 머리를 다듬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영화배우 원빈을 만난 건 큰 행운이었다. 원빈은 주변을 돌아볼 줄 아는 가슴이 따뜻한 배우였다. "오랫동안 머리 작업을 하면서 서로 마음이 통했던 것 같아요. 어느 날 원빈이 '형' 하며 부르기 시작했어요. 솔직히 스태프들에게 배우들은 '갑 중의 갑'인데 먼저 마음 문을 열어주었으니 정말 뜻밖이었죠."

영화가 끝난 후에도 원빈과는 다시 디자이너와 고객으로 인연을 이어갔다. 이런 일이 계기가 되어 미용잡지 촬영, CF 촬영 스타일링 계약들이 줄을 이었다. 김하늘, 문근영, 김주혁 같은 스타들과의 작업도 이 시기에 성사되었다.

소망했던 '강남에서의 꿈'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자 이내 또 회의가 찾아들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계속되는 일 속에 한 원장 '자신'은 없었던 것이다. 어느 날 한 원장은 이 쳇바퀴에서 벗어나기 위한 또 한 번의 '도발'을 계획한다. 그것은 바로 유럽으로의 유학이었다.

◆미용의 총본산 유럽으로 유학 길

서울 강남에서 성공한 디자이너의 연봉은 약 1억5천만원에서 3억원 정도. 여기에 단골손님이 500명을 넘어서면 명실상부한 톱 클래스에 들어간다. 이런 모든 타이틀의 정점을 찍은 한 원장이 유학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러나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거사'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판단에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영국 캔터베리칼리지스쿨에 등록을 했다. 오전엔 랭귀지 스쿨, 오후엔 헤어디자인 공부를 했다. 역시 유럽은 헤어 디자인의 본산이었다.

"한국에서는 아무리 파격을 해도 틀 안에 갇힌 듯한 한계가 느껴졌는데 유럽은 헤어디자인이 전위예술의 한 장르로 인정될 정도로 지평이 넓었어요. 1년 동안 유럽의 헤어잡지, 디자인 쇼를 섭렵하면서 많은 기술과 정보를 얻었습니다."

유학기간이 끝나갈 즈음 현지에서 여러 제의가 들어왔다. 숍에 디자이너로 들어갈 것인가 자신의 사업장을 열 것인가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했다. 그러나 그가 장고 끝에 내린 결론은 낯선 외국에서의 성공이 아닌 한국으로, 그것도 대구로의 귀향이었다.

"서울에서의 성공, 유럽 유학의 로망, 두 가지 꿈을 이루고 나니 이젠 내 가정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대구에서 오랫동안 곁을 지켜준 여자 친구의 권유도 귀국을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2005년 한 원장은 유럽에서의 모든 비전을 내려놓은 채 비행기에 올랐다. 귀국하자마자 대구에서 숍을 열었다. 23㎡(7평)짜리 좁은 공간이었지만 그곳에서 한 원장의 꿈이 무르익고 있었다.

다시 단골이 늘고 사세가 확장되자 한 원장은 상인동에 '도나플로르' 헤어숍을 확장 오픈했다.

이제 한 원장은 자신이 얻은 보람과 행복을 지역사회에 나누는 일을 시작하고 있다.

지역 미용업체 소상공인 조합인 '라샤'에서는 매주 복지시설에 미용 봉사를 나간다. 몇 년 전 조합 봉사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지만 대부분 해체되고 대구만 유일하게 남았다.

또 지역 후배 미용사들을 위해 매주 커트 특강을 하고 있다. 아무 보상도 없이 재능기부로 나선 일이지만 후배들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눌 수 있어서 더 즐겁고 행복하다.

한 원장은 20년 가까이 긴 여행을 거쳤다. 대구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유럽으로, 먼 길을 돌아 다시 대구로 귀향했다. 그 과정에서 머리를 자르고 다듬듯 자신의 인생을 디자인했다.

안주를 모르는 그의 '끼'는 또 어떤 '도발'을 준비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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