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숨결 느끼며 걸음, 걸음 '힐링'
인간은 의미 없는 삶을 견디지 못한다. 그런 때문인지, 살아가야 하는 의미를 찾아 얼마나 먼 길을 걸어왔던가. 물론 사람마다 삶의 의미가 다르며 또 시시각각 다르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의미가 있으므로 어떻게 그 의미를 찾을 것인가에 항상 집중해야 한다.
대가야는 우리 역사에서 사국시대를 연 신비의 나라다. 그러나 대가야가 남긴 것은 능과 소리뿐이다. 1천500년을 거슬러 올라가서 만나는 지산리 고분군과 불어오는 바람마다 열두 줄 가얏고 소리를 퉁겨내는 무한한 정감의 고장, 고도 고령에서 인간과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트레킹을 시작한다.
고령 대가야 박물관에 주차하고, 왕릉전시관 들머리를 지나 가야고분군, 처연한 만월을 닮은 고분 사이의 아름다운 곡선 길을 걷는다. 가야릉에는 산 안개 같은 잔디의 흰 꽃들이 무리지어, 순장 당한 처녀들의 하얀 이처럼 가지런히 웃는다.
길은 고분 속으로 이어지다가 청초하게 핀 야생화를 손에 쥐고 나타나다가, 역사와 현재를 이어주기도 한다. 능 사잇길은 보리밭 길보다 더 임을 부른다. 고분군이 끝나고 왼쪽으로 주산 가는 길로 접어든다. 쉼터를 지나면서 우거진 소나무 숲과 황토로 다져진 오솔길은 환상의 트레킹 길이다. 미숭산 가는 길과 주산 정상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타난다. 여기서는 주산을 먼저 들렀다가 미숭산 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된다. 쌓인 낙엽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황토 바닥이 가야 왕관의 황금빛으로 반짝인다.
눈앞에 나타나는 청금정. 악성 우륵이 가야금을 만들어 연주하던 속칭 '정정골'(고령읍 쾌빈 3리)이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가야금이 울린다는 뜻의 청금정이라 이름한 팔각정이다. 맑은 날에는 대구의 83타워와 시가지가 보이며, 바다로 향해 가는 낙동강도 가물가물 보인다.
솔향기가 가득한 산길, 바람이 불면 가슴을 뜯는 가야금 소리가 나뭇잎을 흔들고, 천년을 건너간 가야인들이 등짐 지고 넘나들던 능선길은 궁중무의 춤사위처럼 유려하다. 무성한 여름 향기 짙은 산길, 이름 모를 새들이 울 때마다 더욱 아름다워지는 산길을 무념으로 걷는다.
이윽고 반룡사와 미숭산으로 갈라지는 이정표를 만난다. 여기서 미숭산 정상까지 갔다가 되돌아 와 반룡사로 내려가는 코스가 적당하다. 여기서부터는 평탄한 길보다 반쯤 '비알'(벼랑) 길이다. 키 큰 적송들이 밀집하여 서 있고, 봄이면 산벚꽃, 철쭉, 진달래가 줄을 서며 얼굴을 환히 드러내는 꿈의 산길이다. 천제단이라 쓰여진 작은 석비를 지나 오르막을 걸으며 조금씩 조망이 열리는 길이 높아지다가 드디어 나타나는 커다란 바위 더미. 미숭산(733.5m) 정상 달각암이다. 약 8㎞을 걸은 셈이다.
미숭산은 고령읍과 합천군 야로면 경계에 우뚝 솟은 고령의 최고봉으로, 원래는 상원산이었다. 고려 말 정몽주의 문인인 이미숭 장군이 고려 국운의 회복을 위하여 군사를 모아 산성(약 1.5㎞)을 수축하고 이성계 군과 싸운 곳이다. 그러나 장군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사암에서 몸을 던져 순절했고, 그 절개를 기려 산 이름이 미숭산으로 바뀌었다. 정상에서 바라보면 주변 일대가 한눈에 다 들어온다. 북쪽으로 가야산의 침봉들이 하늘과 땅을 가르고, 고령 합천의 산야는 물론, 우두산 문수봉 독용산 황악산 비슬산 조화봉 관기봉까지 들어오는 조망은 가히 일품이며 아찔하다. 여기서 미숭산 자연휴양림으로 내려가는 길과 고령군 쌍림면 귀원리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하지만 반룡사를 거치는 길이 돌아가는 여건이 가장 좋다. 주산에서 미숭산 반룡사까지는 트레킹로에 잘 만들어진 이정표가 곳곳에 있다. 갈림길마다 봉우리마다 현 위치와 다음 목표 지점까지 거리 방향을 정확하게 알려준다. 따라서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미숭산에서 반룡사로 내려오는 길도 편안하다. 반룡사에서 주지 원광 스님을 만나 절의 내력을 듣는다. 원효대사가 중창할 때 이곳 지형이 용과 닮아 반룡사라 했다는 것으로 추정할 때 그전에 이미 절이 있었고, 가야산 해인사를 지을 때(애장왕 3년, 802년) 반룡사에서 주관했다는 설이 있다. 절을 나서며 돌아본다. 그 몽매에도 잊지 못할 가얏고 열두 줄 같은 산길, 가야 왕관의 누런 빛이 서려 있던 주산에서 미숭산까지 산길, 노송의 향기와 찔레 향기, 이름 모를 새소리가 영혼을 찌르던 산길, 그 아름다운 길에서 우주의 뿌리와 다시 연결되고 더 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경험한 것이다.
글 김찬일 대구문학인트레킹회 회장 kc12taegu@hanmail.net
사진 장익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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