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젊을 때는 북해도에 가봤니라."
내가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 할아버지는 노상 이런 얘기를 해주셨다. 그때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그냥 우리 할아버지는 매우 먼 어디에 여행 다녀오신 줄로만 알았다. 북해도가 어딘지, 그곳에 가면 무엇이 있는지, 그곳에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알지를 못했다. 그리고는 할아버지께서 다녀오셨다는 그 북해도에 대해선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았다. 그러다 조금 더 철이 들었을 무렵, 할아버지가 노상 말씀하시던 그 북해도가 내가 생각하던 유람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우던 강제 징용을 당해 '잡혀가셨던' 것이었다. 1927년생인 할아버지께서 1944년에 징용 가셨다가 광복 이듬해인 1946년 봄쯤 돌아오셨다니, 꽃다운 청년 시절의 2년간을 강제 노역으로 고초를 겪으신 것이었다. 그렇게 무서운 경험을 하셨으니 당신의 생전 북해도, 북해도 하시며 똑같은 이야기를 손주들에게 하셨던 것이다. 철없던 손자 손녀들은 귓등으로만 흘려들었고.
5일 일본의 산업혁명기 산업시설 23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중에는 6만 명에 가까운 조선인들이 강제 노역에 시달린 제철소, 조선소, 탄광 등 7곳도 포함되어 있었다. 21개 세계유산위 위원국들이 만장일치로 일본의 손을 들어주었다. 물론 우리 정부도.
2009년 1월 일본 정부가 이들 시설을 잠정목록으로 등록하면서 시작된 한'일 두 나라의 외교전이 막을 내렸다. 일본 정부가 조선인의 강제 동원과 강제 노역 사실을 인정했다며 한국 측은 흥분했다. 등재 결정 직후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기자회견까지 열며 우리 외교력의 승리라며 자화자찬을 했다.
하지만 우리가 얻어낸 것은 사토 구니(佐藤地) 주 유네스코 대사의 '강제 노역'(forced to work)이란 한마디와 정보센터 설립 등 희생자를 기리는 시설을 만들겠다는 '구두 약속'뿐이었다. 등재 결정문 본문도 아닌 각주에 일본 대표단의 발언록을 연결해, 그 발언록의 한 귀퉁이에 나오는 강제 노역이란 말 한마디뿐인데. 문헌학자나 서지학자가 아닌 다음에야 일반인들이 어디서 그 말을 찾아낼 수 있을지.
그마저도 일본 관리들의 잇따른 부인성 발언으로 희석되고 말았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외무상은 등재 결정 직후 사토 대사의 발언이 "강제 노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고 부인했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도 기시다 외무상과 같은 의미로 해석했다. 우리나라와 중국 정부가 즉각 반박하긴 했지만, 우익세력이나 보수층을 의식한 일본 정부의 이런 태도는 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정보센터를 설립하겠다는 약속도 지켜질지 의문이다. 일본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을 제재하거나 강제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와 합의한 내용을 지키는 것은 전적으로 일본 정부와 지자체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일본이 그렇게 나올 줄 몰랐을까. 그만큼 우리 외교가 순진했던 걸까.
그렇게 해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강제 징용 피해자들의 한이 반이라도 풀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세계유산 등재에 목맨 일본이 제시한 미끼를 순진하고 어리숙한 우리 정부가 덥석 물어버린 것이다. 세계유산 등재에 다급한 일본보다, 표 대결까지 가는 상황이 되어 혹시라도 패배하게 될까 겁낸 우리 정부가 더 마음을 졸였기 때문은 아닐까.
일본과의 외교는 왜 다 이런 식인지 모르겠다. 겉은 그럴 듯한데 알고 보면 알맹이가 별로 없다. 일본, 그럴 줄 알았다고 국민들은 아는데 말이다. 여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독도 문제나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와 관련한 외교 현안들이 걱정일 뿐이다.
빛바랜 사진 속 훈도시(속옷) 하나만 걸친 채 탄광 안에서 맨몸으로 검은 땀을 흘리는 조선인, 채찍에 맞아 목덜미와 등에 깊은 흉터가 남은 몸, 앙상하게 야위어 갈비뼈가 그대로 드러난 청년들의 모습들 위로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얼굴이 오버랩되는데….
댓글 많은 뉴스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원장 탄핵 절차 돌입"…민주 초선들 "사법 쿠데타"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
5·18묘지 참배 가로막힌 한덕수 "저도 호남 사람…서로 사랑해야" 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