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경제계의 큰 별이 졌다.
이윤석 화성산업㈜ 명예회장이 8일 오후 6시 10분 대구 삼덕동 경북대병원 대특실에서 노환으로 타계했다. 향년 99세.
장남 이인중 화성산업 회장과 차남인 이홍중 대표이사 등 가족이 마지막을 지키는 가운데 이 명예회장은 평온하게 영면했다고 회사 측은 전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이 명예회장은 가끔씩 회사에 들러 경영을 손수 챙길 정도로 건강했으나 올해 초 노환으로 남구 봉덕동 대덕맨션 자택을 떠나 경북대병원에 입원해 생활해왔다.
이 명예회장은 평생을 기업인으로 살아온 지역 경제계의 원로다. 이 명예회장이 화성산업을 창업한 것은 1958년 9월. 15세의 어린 나이에 건설현장에 뛰어들어 19세에 현장소장으로 발탁될 정도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고, 30세에 '삼화토목㈜'의 최연소 발기인으로 참여해 40세에 공동대표이사로 취임했다. 그러나 공동경영에서 한계를 느끼던 중 건설업법 시행령 개정을 앞두고 독립업체 경영을 꿈꾸는데, 당시 울릉도 일대의 건설사업에 참여해오던 '삼용사'를 인수해 비로소 꿈을 이뤘다. 이것이 화성산업의 시작이다. 화성산업 창업 후 동해안 일대의 항만 및 방파제공사를 비롯하여 교량공사, 수자원개발공사, 도로공사 개설 등 주로 토목공사에 주력했다.
그러던 중 1971년 대구 동문동 교동상가아파트 신축공사를 했는데 당시 공사대금을 받지 못하고 대물로 건물을 넘겨받자 남다른 도전정신을 발휘해 동아백화점을 개점했고, 이것이 유통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계기가 됐다. 1972년 동아백화점을 개점한 이 명예회장은 정부의 유통산업근대화 정책과 발맞추어 회사를 더욱 성장시켜 나갔고, 회사는 1974년 지방업체로는 유일하게 상공부 지정 슈퍼체인회사로 지정을 받으며 경상도 일대로 점포를 확장시켜 지방 유통의 핵으로 자리매김했다.
도로, 교량 등 토목공사를 중심으로 성장하던 건설 부문은 1988년 정부의 '주택 200만 호 건설사업'의 시행으로 본격적으로 주택사업을 시작했는데, 수도권 신도시 개발 참여를 비롯하여 지금까지 약 6만 가구가 넘는 주택을 공급해 국민의 주거안정에 기여해왔으며, 항만, 도로, 교량, 공항, 철도, 지하철 등 국가기간산업 건설을 통해 국토발전에도 많은 노력을 했다.
화성산업 창업 후 순탄하고 영광스러운 날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창업 1년 만에 사라호 태풍으로 인해 울릉도 방파제공사가 재앙에 휘말려 회사 존폐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며, 백화점 개점 초기에는 화재로 인해 점포가 잿더미가 되기도 했다. 그러한 시련과 위기가 닥쳤을 때마다 이 명예회장은 직원들을 다독이고 용기를 북돋웠으며 시민들의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조속한 복구계획을 수립하는 등 불굴의 개척정신을 발휘하여 위기를 극복해왔다.
이 명예회장은 창업 이래 인간존중의 가치를 기본 이념으로, 나눔과 섬김의 기업 문화를 실천하고자 노력해 왔다. '기업이윤의 사회로의 환원'이라는 이념 아래 1993년 사재 50억원을 출연하여 화성장학문화재단을 설립했는데, 지금까지 인재육성을 위한 장학사업을 비롯하여 학술지원, 환경사업, 불우이웃을 돕기 위한 사회복지사업, 지역문화예술 진흥을 위한 문화사업 등을 활발히 전개했다.
지역 경제계 거목이 스러지자 경제계는 아쉬움을 나타냈다. 대구상공회의소 진영환 회장은 "지역 경제계의 거성이 사라졌다.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고 했다.
2010년 '제6회 서상돈상'을 수상한 이윤석 화성산업 명예회장은 시상식 직후 상금 2천만원 전액을 매일신문 이웃사랑 제작팀에 전달했다.
유족으로는 인중, 홍중, 익중 3남과 2녀가 있다. 빈소는 대구가톨릭대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11일(토), 장지는 경산시 진량읍 현내리 선영하.
임상준 기자 new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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