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인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변방을 침범하려다가 시조가 신령한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이내 돌아갔다."(BC 50년, 혁거세거서간 8년), "왜인이 병선 100여 척을 거느리고 와서 바닷가 민가를 침략하므로 육부의 강병을 발동하여 막았다."(14년, 남해차차웅 11년), "왜국에 큰 흉년이 들어 그 나라 사람으로 음식을 빌리러 온 자가 1천여 명이었다."(193년, 벌휴이사금 10년), "왜병이 일례부를 습격하여 불 지르고 민간인 1천여 명을 잡아갔다."(287년, 유례이사금 4년), "왜국 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들을 두고 구혼하므로 아찬 급리의 딸을 보내주었다."(312년, 흘해이사금 3년), "왜국과 우호를 맺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볼모로 보냈다."(402년, 실성이사금 원년)
삼국사기는 신라 시조 혁거세거서간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곧이어 왜(倭)의 신라 침범을 기록한다. 왜와의 질긴 애증의 역사는 그렇게 등장한다. 반복의 왜침(倭侵)과 구휼(救恤), 통교(通交), 통혼(通婚), 방어(防禦)의 수난사다. 진평왕은 591년 왜 사신을 맡을 부서인 '왜전'(倭典)도 설치한다. 고구려, 백제의 침공 시련까지 겹칠 때라 왜와 좋은 관계가 필요했다. 신라는 뒷날 당(唐)과 대결하던 시절엔 '별헌물'(別獻物)이라며 많은 선물도 왜에 주었다. 다양한 대일 외교 정책을 편 셈이다.
그런 왜는 고려 멸망을 재촉하는 화근이었고 조선 개국에도 한 역할을 하면서 결국 조선을 무너뜨렸다. 이성계는 1380년 왜와의 황산전투 승리로 입지를 다졌고 내친김에 나라까지 세웠다. 그러나 조선도 왜가 골치 아팠다. 세종대왕이 왜구 소굴 대마도 정벌에 나선 이유다. 세종 때 일본을 다녀온 신숙주가 '해동제국기'를 남기고 1475년 죽기 전 성종 임금에게 "일본과 사이좋게 지낼 것"을 유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신라와 조선 초기에는 왜를 그렇게 관리했다. 세월이 흐르고 경계심도 풀려 점차 왜에 소홀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고 1910년 급기야 나라를 통째로 잃는 지경에 이를 때까지.
22일로 한'일 수교 50주년을 맞았다.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서울과 일본에서 열린 기념행사에 서로 참석해 미래를 이야기했다. 오랜 질곡의 역사를 가진 두 나라는 서로 필요한 존재다. 미움으로 미래를 버려둘 수 없다. 지금은 같이 길을 낼 시기다. 단, 미래 평화와 양국을 위해 말 대신 우리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가깝고도 먼 나라'에서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가 되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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