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삼중으로 억눌리고 질식하는 여성들의 운명은 언제까지든지 기구만 하구려. 더욱 절박한 고통을 주는 건 조선의 남편들이에요. 소위 민주진영의 일꾼들까지 가정 내의 민주주의는 영 모르고 안해를 계몽하지 않고 독서나 집회를 위해서 시간을 주지 않고 이러고는 여성운동이 활발하지 못한 것만 개탄하잖아요."
1946년 정칠성의 독립신보 인터뷰 '조선의 남편들이여, 여성계몽에 힘쓰는가?' 가운데 일부이다. 해방 전후 사회에 감히 이런 발언을 과감히 할 수 있었던 이 여성은 누구인가.
정칠성은 대구에서 태어나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기생학교에 들어갔다. 1915년까지 기생생활을 하다가 18세가 되어 상경해 한남권번에 등록했다. 기생 이름이 '금죽'이었다. 기생으로 살아왔지만 정칠성은 여성운동 지도자로, 사회운동가로 이후 큰 궤적을 남긴다.
정칠성은 1919년 3'1 만세운동을 계기로 사회운동에 참여했다고 회상한다. '기름에 젖은 머리를 탁 비어 던지고 일약 민족주의자가 되었다'고 표현했다. 의지가 강하고 꿈이 컸던 여성으로, 1922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도쿄영어강습소에서 영어공부를 하고 일본 유학을 다녀오면서 사상적 변화를 겪게 된 것이다.
그녀는 1923년 대구에서 이춘수와 함께 최초의 근대적 여성단체인 대구여자청년회 창립을 주도하고 집행위원이 됐다. 이후 정칠성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1924년 우리나라 최초 사회주의 여성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를 창립하고, 1925년 도쿄에서 여자 유학생단체인 삼월회를 조직한다. 1927년 창립된 신간회의 자매단체 '근우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근우회는 여성 항일 구국운동과 여성 지위 향상을 위한 운동단체로 잘 알려져 있다. 이런 그녀를 사람들은 '사상기생'이라 불렀다. 정칠성의 정치적 행보도 매우 눈에 띄는 것이지만, 여성해방을 부르짖은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로서 업적을 남겼다. '조선지광' 1931년 정월호에 실린 '연애의 고민상과 그 대책'을 읽노라면, 지금보다 80년을 앞서 살던 여성의 발언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통찰력이 있다.
"연애 고민을 대량생산하여 인간에게 적지않은 불행을 초래케 하는 것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라 할 것이외다. 그렇다는 이유는 여러 가지로 들 수 있으니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는 순결하고 진실하여야 할 애정 그것까지도 물질적 이해로 타산하지 않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외다. (중략) 봉건사상과 경제적으로 남자에게 모든 권한이 있는 이상 연애에 있어서도 여자는 자연히 불평등한 지위에 서게 됩니다. 위선 정조관부터 남자가 다르게 되어서 남자는 제맘대로 성적 방종을 하면서도 여자에게는 편무적으로 정조를 강제하려 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혹은 남녀는 원래 생리적으로 다른 까닭에 모성을 가진 여자 편은 그 여자의 혈통을 밝힐 필요상 정조를 지켜야 하겠다 하지마는 그것은 전혀 남성의 성적 방종을 옹호하려는 한갓 구실에 불과한 줄 압니다."
사회와 여성에 대한 자각으로 봉건적 남녀 차별을 뛰어넘어 시대를 앞선 활동을 했던 정칠성은 대구가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큰 별이다.
대구여성가족재단 책임연구원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野, '피고인 대통령 당선 시 재판 중지' 법 개정 추진
'어대명' 굳힐까, 발목 잡힐까…5월 1일 이재명 '운명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