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구계항

입력 2015-06-11 05:00:00

내 고향 구계항은 영덕군 남정면 구계리에 있는 작은 항구다. 백두대간이 한반도의 등줄기를 타고 내려와 태백산맥에서 한번 숨을 고른 곳, 동해안 7번 국도를 따라 장사해수욕장을 지나면 흰 등대와 붉은 등대가 마주 보는 아름다운 항구다. 열두 살 어린 나이에 혼자 대구로 전학 온 나는 꿈속에서도 바다가 그리웠다. 어부인 아버지는 한겨울 장갑 낀 손이 꽁꽁 얼어붙어도 자식을 위해 바다로 나가야만 했다. 잡은 고기들은 인근 강구항이나, 구계 어판장에서 상인들에게 팔려 대처로 나갔다. 고된 하루 일을 마치면 노을이 질 무렵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바다가 바라다보이는 동구 밖 입구에 서서 네 살의 나는 아버지가 사오는 알사탕을 침이 고인 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린 자식을 남겨두고 고기 눈깔 같은 사탕을 사기 위해 당신은 저승의 바다로 서둘러 떠난 것이다.

지천명이 지난 지금도 생사(生死)의 진리를 모르지만, 그때 역시도 죽음이 알사탕 같다고만 생각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은 몇 날 며칠 장대비가 퍼부었다. 마당에 천막을 치고 문상객을 맞은 나는 마냥 신이 났다. 모처럼 집 마당에 동네 어른들로 넘쳐난 것을 본 나는 무슨 잔칫날 같은 생각을 했다. 서른의 어머니는 죽은 아버지 관(棺)을 붙잡고 호곡(號哭)을 하시고, 그 설움의 깊이를 알길 없는 난, 맞지도 않은 상복을 입고 천방지축으로 빗속을 뛰어다녔다. 그 어머니마저 이제 불귀의 객이 되고만 지금, 어린 아들의 철부지를 지켜본 청상의 어머니 흉중은 어떠했을까? 가슴 한쪽이 무너지는 것 같다.

아버지를 산에 묻고 돌아온 다음 날에도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했다. 전처럼 자전거를 타고 알사탕을 사서 올 거라는 막연한 생각만 지닌 채, 동구 밖에서 마냥 앉아 기다렸다.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선친의 친구 분을 만날 때마다 "우리 아버지는 언제 와요?"라고 되물었다. 그러면 바다를 가리키며 "네 아버지는 이다음에 돈 많이 벌어 저 바다를 건너온단다"라고 일러주었다.

그런 후 나에게는 남몰래 언덕에 앉아 바다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혹시라도 수평선 너머 붉게 떠오르는 해를 타고 아버지가 물 위를 걸어 나오지 않을까 하는 환각에 사로잡혔다.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면 어등(漁燈)을 켜고 바다를 깨워야 했다. 여름 새벽, 우연히 동네 형을 따라 소몰이를 하러 봉황산 꼭대기에 올랐던 어린 시절, 그 황홀한 일출의 바다를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아침 핏빛의 바다, 물속에 잠기어 꿈틀거리던 햇덩이는, 아비에 대한 나의 원초적인 그리움이었다. 두 팔을 벌려 아침 산정에서 "아버지, 아버지" 하고 목 놓아 외쳤던 소년은 이제 시인이 되어 다시 구계항을 찾는다. 그렇다. 언제나 고향 구계항은 타향살이의 내게 무명(無明)과 망집(妄執)에서 벗어나게 하는 성소(聖所)이자 씻김의 장소였다.

김동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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