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구비문학론 수업 과제를 핑계 삼아 주말마다 경기도 양평 일대를 혼자서 떠돌아다닌 적이 있다. 목적지도 없이 그저 녹음기 하나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을 만나면 아무나 말을 붙이고 노래를 듣고 옛날 이야기들을 들었다. 양동면에 있는 금왕리라는 마을 입구에 도착했을 때 처음 마주친 사람은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보이는 아이였다. 나는 마을 이름이 특이하다는 생각에 혹시 마을 이름이 왜 금왕리인지 아냐고 물었더니 아이는 "옛날에 이 동네에서 금이 '왕' 많이 나와서 금왕리예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중에 어른들한테 들어 보니 마을에 금광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 때문에 마을 이름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고 했다. 아이의 말이 한편으로는 어이없지만 마을의 내력을 조금은 알고 있다는 점이 기특하게도 생각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이의 말과 같은 이유로 마을의 이름을 지었다면 마을의 이름은 '금왕리'에서 '금짱리'를 거쳐 지금은 아마 '금개리'가 되었을 것이다. 대충 짐작을 하겠지만 이것은 언어의 유행과 관련이 있다. 1990년대에는 보통보다 크거나 정도가 심할 때에는 '왕'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다. 컵라면 광고에서 최고라는 의미로 사용한 "왕입니다요."라는 카피는 당대 최고의 유행어 중 하나였는데, 이 영향 때문인지 원래는 '왕개미, 왕게, 왕소금, 왕겨'와 같이 접두사로만 쓰이던 말이 명사뿐만 아니라 '왕 따돌림'(줄여서 왕따), '왕 많다', '왕 좋다'와 부사로까지 사용되기도 했다. 현재는 '왕'을 부사로 사용하는 사람은 없지만 이제는 표준어로 사전에 등재된 '왕따'와 같은 말에 유행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뒤를 이어서는 '왕'처럼 우두머리를 뜻하는 '장'(長)에서 온 '짱'을 쓰기도 했다.
요즘 학생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과거에 '왕'을 썼던 자리에 전부 '개'를 쓰고 있다. 매우 많은 것은 '개 많다'고 하고, 박해민 선수가 뛰는 것을 보고는 '개 빠르다'고 한다. 단축 수업을 해서 한 시간 일찍 마치거나, 조금 공부해서 시험 점수가 많이 올랐을 때는 '개이득'이라고 한다. 좋은 것을 나타낼 때 요즘 '꿀'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매우 좋은 경우에는 '개꿀'이라고 한다. 어른들에게 '개'는 욕을 할 때 사용되는 말이거나 '야생 상태의' 또는 '질이 떨어지는', '사이비'의 뜻을 가진 부정적인 의미의 접두사를 연상하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쓰는 것을 좋지 않게 본다.
흥미로운 점은 '왕'과 '개'는 어감은 매우 다르지만 사용 원리는 비슷하다는 것이다. 접두사 '왕-'은 사전에 보면 앞에서 이야기한 단어들 외에 '왕가뭄, 왕고집'처럼 '매우 심한'의 뜻을 더하는 것으로 사용된다. 1990년대에는 이 접두사 '왕-'을 아무 데나 갖다 붙였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접두사 '개-'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개살구, 개떡'처럼 질이 떨어진다는 의미, '개꿈, 개죽음'처럼 헛되거나 쓸모없다는 의미로 사용이 된다. 그리고 '개망나니, 개잡놈'처럼 부정적인 말 앞에 쓰여 정도가 심함을 나타낼 때 쓰이기도 한다. 이때의 '개-'는 '왕고집'의 '왕-'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다. 원래는 부정적으로 사용되던 접두사를 정도가 심하다는 의미로 모든 상황에 갖다 붙이고 있는 것이다. 접두사뿐만이 아니라 명사로, 부사로 다양하게 사용되는 것도 비슷하다.
어른들은 젊은 사람들이 '개-'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우려의 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10년 후, 20년 후에도 사람들이 계속해서 이 말을 사용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요즘 세상에 '왕 많다', '짱 좋다'라는 말을 하면 20세기에 냉동되었다가 깨어난 인간 취급을 받게 된다. 마찬가지로 '개 많다'는 말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이 바로 한때 유행했던 말이 가지는 운명이다.
능인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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