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의 문중이야기] <1>문무겸전의 명가, 연안 이씨

입력 2015-05-19 05:00:00

입항조 이말정, 다섯 아들 9차례 등과…공부하던 바위 '오자암' 이라…

연성부원군 이말정 묘=매봉산 기슭에 위치한 연성부원군 이말정과 그의 처 곡산 한씨의 묘를 연안 이씨 정양공파 종손 이철응 씨가 둘러보고 있다. 이곳은 금채락처의 명당으로 소문나 종종 전국의 지관들이 명당자리를 구경하러 오기도 한다. 정운철 기자 woon@msnet.co.kr
연성부원군 이말정 묘=매봉산 기슭에 위치한 연성부원군 이말정과 그의 처 곡산 한씨의 묘를 연안 이씨 정양공파 종손 이철응 씨가 둘러보고 있다. 이곳은 금채락처의 명당으로 소문나 종종 전국의 지관들이 명당자리를 구경하러 오기도 한다. 정운철 기자 woon@msnet.co.kr

매일신문은 지난해 김천시와 손잡고 김천의 뿌리 찾기 작업의 하나로 '김천역로를 따라서' 연재를 한 바 있다. '김천역로를 따라서'는 주변 21개 속역을 거느린 김천도역에 부임한 도찰방 이중환을 화자로 내세워 김천이 조선 5대 시장의 하나로 커온 배경, 그리고 근대화 과정에서 경상북도 내 첫 번째 시 승격을 이끌어 내는 등 김천이 성장해온 과정을 돌아봤다.

올해 새롭게 시작하는 김천의 뿌리 찾기는 사람을 위주로 한 문중 이야기를 다루려 한다. 김천에 입향해 김천과 함께 발전해온 가문의 이야기와 그 속에서 부딪히고 어울리며 살아온 선조의 삶을 통해 김천의 뿌리를 찾아본다.

지면을 통해 다룰 문중은 지역에 뿌리를 둔 여러 문중 중 김천에 큰 영향을 끼친 문중과 인물, 자손들의 번성 등 다양한 부분을 종합해 선정했다.

매일신문이 다루는 김천의 문중 이야기는 정사만이 아닌 야사와 전설 등을 모두 망라해 글을 풀어나갈 예정이다. 이번 시리즈는 역사적인 고증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전설과 야사를 가미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들려 주려 한다.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사실을 다소 부풀리기도 하고 글쓴이의 상상을 덧붙이기도 했음을 미리 밝혀 둔다.

문무겸전의 명가, 연안 이씨

원래 연안 이씨는 한성부 명례방 즉, 지금의 서울 중구 필동 일대를 기반으로 대대로 살아왔으나, 1400년 무렵 연성부원군 이말정이 구성면 지품마을에 터를 잡고 형 이후 이보정이 상좌원에 이주하면서 김천 연안 이씨의 뿌리가 됐다.

이보정, 이말정 형제가 김천으로 이주한 연유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이말정의 처가 곡산 한씨였고 장인이었던 평절공 한옹이 지례에서 전원생활을 즐겼던 것으로 알려져 처가와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말정이 먼저 처가와 장인이 있던 김천으로 이주했고 형을 불러들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8대 명당과 역장으로 피한 굴묘 수난

"명당을 앞에 두고 무슨 고민을 저리 하는지…."

1446년 이말정의 처 곡산 한씨의 장례를 치르고자 묏자리를 찾던 연안 이씨 형제들은 상갓집 앞을 지나는 스님이 무심코 흘린 말에 버선발로 뛰어나와 스님을 찾았다. 조금 전 문앞에 있었던 스님은 어느새 보일 듯 말 듯 휘적휘적 걸어 거창을 향해 가고 있었다.

아무리 쫓아가도 거리가 줄어들지 않았지만, 꾸준히 따라가 대덕산 자락 아래 쉬는 스님을 만나 묏자리를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자식들의 정성에 걸음을 돌린 스님은 상원마을 뒤 매봉산 자락을 지목하며 땅을 파면 석함이 나올 것이니 절대 열어보지 말라고 당부했다.

스님이 지목한 곳을 파자 스님의 말처럼 석함이 나왔다. 석함을 열지 말라는 당부가 있었지만, 땅을 파던 인부의 실수로 석함이 열렸고 함 속에서 벌 두 마리가 나와 날아갔다. 이를 본 스님은 아쉬워하면서도 발복이 미뤄지기는 하겠지만, 후손 중에 큰 인물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스님의 말처럼 이말정의 아들 5형제는 모두 9차례에 걸쳐 과거에 급제하는 등 연안 이씨 문중이 김천 땅에 뿌리를 내리는 데 크게 이바지를 하게 된다. 이말정의 처 곡산 한씨의 묘가 있는 곳은 금채락처(金釵落處: 금비녀가 떨어진 곳)의 명당으로 알려지며 지금도 전국 각처의 지관들이 명당을 보러 찾아오는 곳이 됐다.

곡산 한씨 묘소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한다.

구성면 상원 마을 뒤 매봉산 기슭에 있는 이말정과 곡산 한씨 묘는 후손들 묘보다 아래쪽에 위치한다. 이는 일반적으로 조상의 묘 아래에 후손의 묘를 두는 방식과 달라 기피하는 현상으로 역장(逆葬)으로 불린다.

연안 이씨 문중이 역장을 하게 된 이유는 이말정의 후손 이호민의 주장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호민은 좌찬성을 지내고 부원군으로 봉군된 인물로 임진란 때 청원사(請援使)로 중국에 가서 이여송에게 원군을 청했다.

이때 이여송이 압록강을 건널 다리를 조선 사대부의 관목(棺木)으로 놓으라 요구했는데, 이는 조선에 인물이 많이 나서 중국을 넘보는 것을 막으려고 명당의 혈을 끊으려는 심산에서였다고 한다.

나라가 위난에 처한지라 조정에서는 굴총대감(掘塚大監)을 임명하고 전국의 묘를 파서 얻은 관목으로 압록강 다리를 놓았다. 이때 매봉산 연안 이씨의 묘는 금채락처의 명당이지만 역장 덕분에 굴묘 수난을 면했다고 전해온다.

연안 이씨 집안에서는 이호민이 어린 손자가 할아버지 어깨에 올라앉는 것은 사랑의 교감이지 망발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었지만, 이는 핑계이고 굴묘 수난을 예측한 일로 전해지고 있다.

연안 이씨 집안에 전해오는 이여송과 관련한 이야기는 정사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이여송과 관련해 임란 당시 전국 곳곳에서 혈을 끊으려 했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이여송과 연안 이씨 문중 묘와 관련된 이야기도 마냥 전설로만 치부하긴 어렵다.

◆오자암(五子岩)에 얽힌 이야기

이말정은 자식들과 함께 구성면 지품마을로 이주해 터를 잡았으나 감천이 크게 범람하며 기반을 잃게 되자 거창군 모곡(못골)으로 가족들과 함께 이주한다. 이후 다시 지품마을로 돌아오기 전까지 살았던 모곡에는 오자암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말정이 다섯 아들을 각각의 바위 위에 앉혀두고 공부를 시켜 자식들 모두가 등과하는 성공을 거뒀다는 것. 이후 주변 사람들이 다섯 아들이 공부하던 바위를 오자암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실제로 1441년(세종 23) 첫 아들 이숙황이 사마시에 등과한 것을 시작으로 1453년(단종 1) 넷째 아들 이숙기가 진사과 2등과 무과 장원을 차지하는 등 5명의 아들이 9차례에 걸쳐 과거에 급제한다.

특히 김천 연안 이씨의 가문 이름을 드높이게 된 계기는 1453년 치러진 과거다. 이 해 과거는 문과와 무과 장원을 모두 연안 이씨 자손들이 차지해 문무를 겸전했다는 평을 받으며 연안 이씨 가문의 이름을 전국에 알렸다.

문과 장원을 차지한 이보정의 둘째 아들 이숭원과 무과 장원을 차지한 이말정의 넷째 아들 이숙기는 각각 1428년생과 1429년생으로 사촌 형제간이다.

두 사촌 형제는 각각 충간공과 정양공으로 불리며 상원과 상좌원에 대대로 거주해 오는 김천 연안 이씨의 중시조가 된다.

이들 사촌 형제는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록에 이름을 올리며 김천 연안 이씨 문중의 번영을 이끌었다. 또 무관으로 장원급제한 이숙기는 1467년(세조 13)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로를 인정받아 적개공신 1등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공동기획 김천시

김천시사

김천 종가문화의 전승과 현장(민속원)

김천 정양공 이숙기 종가(경상북도'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정양공 참정사(정양공 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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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이철응 연안 이씨 정양공 문중 종손

이석화 연안 이씨 충양공화수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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