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 주창한 서상돈 선생의 삶

입력 2015-05-09 05:00:00

쌀밥 아끼며 나눔에 아낌 없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현 선각자

국채보상운동 주창자인 서상돈 선생은 구한 말 일제의 경제주권 침탈에 대항해 애국
국채보상운동 주창자인 서상돈 선생은 구한 말 일제의 경제주권 침탈에 대항해 애국'애족 활동과 구빈 활동에 헌신한 선각자였다. 매일신문 DB

서상돈(1850~1913) 선생은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주창한 선각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국채보상운동 이전부터 애국'애족 활동에 헌신한 사회운동가였다. 이런 밑바탕에는 천주교의 청빈한 정신이 있었다.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가 천주교 대구대교구 설정 100주년(2011년)을 기념해 제작한 책 '서상돈 아우구스티노'(마백락 엮음)를 통해 그의 삶을 짚어본다.

서상돈 선생은 1850년 김천에서 부친 서철순(바오로)과 모친 김아가다 사이의 2형제 중 장남(달성 서씨 24세손)으로 태어났다. 열 살도 되기 전 부친을 여읜 그는 어머니와 함께 외가가 있던 대구 부근으로 이사를 왔다.

그의 집안이 천주교에 입교한 것은 한국천주교 창립 시기인 17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천주교 박해가 절정에 이르렀던 병인박해 때 삼촌 3명이 순교하는 비극을 맞았다.

선생은 어린 나이에 보부상 점원으로 들어가 경북 일원의 시골 장터를 다니며 장사를 배웠다. 비범한 수완을 발휘해 소금 장사, 건어물 장사로 기반을 넓힌 그는 40대 무렵에 상주, 김천, 칠곡 등 여러 지역에 많은 토지를 사들인 거상으로 성장했다.

선생은 1890년 무렵 경상도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김보록(로베르) 신부와 인연을 맺으며 선교와 구빈(救貧) 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큰 부자가 됐어도 결코 쌀밥을 먹지 않을 정도로 검소했던 그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베풂에는 아낌이 없었다. 대구 본당(현 계산성당) 건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1911년 천주교 대구교구 설정 때 약 3만3천㎡의 땅(현 남산동 교구청 일대)을 희사했다. 선생은 45세 때 경상도의 세정을 총괄하는 관직(시찰관)을 지내기도 했다.

선생은 친척인 서재필 선생이 1896년 독립협회를 창설한 무렵 은밀히 독립 구국 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일제는 차관을 앞세워 경제 수탈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대구에서도 일본인 고리대금업자들에게 전답과 가옥을 저당 잡히고 재산을 뺏긴 사람들이 날로 늘어났다. 조선인에 대한 일제의 세금 징수도 극에 달했다. 이에 선생은 1906년 김광제 선생과 함께 애국'계몽조직인 '대구 광문회'를 조직, 국채 1천300만원을 3개월간 담배를 끊어 갚고 국권을 되찾자는 국채보상운동 건의서를 발의하게 된다. '국채를 갚으면 나라는 존(存)하고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亡)할 것'이라는 절절한 외침은 전국 각지로 울려 퍼져 나갔다. 남자들은 담배를 줄이고 부인들은 은가락지와 은장도를 내놓고 기생들과 거지까지 동참했다.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훼방으로 1908년 중단되지만, 남녀노소, 신분을 초월한 범국민운동으로 승화돼 이후 물산장려운동과 애국운동의 도화선이 된다. 평생을 애국'애족에 앞장섰던 선생은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이 패망한 지 3년 뒤인 1913년 향년 64세로 선종(善終)했다.

최병고 기자 c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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