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초한 전쟁. 물자와 병력 등 규모나 전투력 면에서 크게 뒤졌던 한나라 유방이 초나라 항우를 물리쳤다. 한 고조가 천하를 얻은 뒤 신하들과 연회를 베풀어 자축하면서 한나라의 승리 요인을 말했다.
"나에게는 장막 안에서 천 리를 내다볼 줄 아는 '장자방', 내정을 잘 관리하고 적시에 군량미를 보급해준 '소하', 대군에 맞서 적은 군사로 연전연승한 '한신'이 있었기에 천하를 얻을 수 있었다."
신하를 잘 뽑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해 이길 수 있었다는 얘기다. 인사의 승리였다.
춘추시대 진나라 임금 도공이 중군위(中軍尉) 자리에 있던 신하 기해가 은퇴를 청하자, 후임으로 누가 적당한지 물었다. 기해는 자신의 원수인 해호를 추천했다. 도공이 놀라 "해호는 그대의 원수가 아니냐"고 물었다. 기해는 답했다. "주군께서는 저에게 이 자리의 적임자를 물으셨지, 저의 원수가 누구냐고 물으신 게 아닙니다."
도공은 해호가 임명되기도 전에 죽자, 다시 기해에게 적임자를 물었다. 기해는 기오를 추천했다. 도공이 놀라며 "기오는 너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물었다. 기해는 답했다. "주군께서는 소신의 아들이 누구냐고 물으신 게 아니라, 이 자리를 대신할 적임자를 물으셨습니다."
기해는 자신의 원수든, 아들이든 참 인재를 추천한 신하였고, 도공은 공평무사한 기해의 추천을 믿고 받아들인 임금이었다.
'죽은 제갈량이 산 사마의를 쫓는' 형국이 정국을 강타하고 있다. 인사 참사, 세월호 참사에 이어 친박(친 박근혜) 참사란 말이 나돌 정도다.
성완종 리스트가 비록 일부 친박 핵심에 국한된 표적 리스트라고 하더라도 죽은 자의 외침 그 자체는 대개 진실을 담고 있기 마련이다. 서슬 퍼런 산 권력이 죽은 자의 외침 앞에 떨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게다. 거짓은 그럴듯하지만 수명이 길지 않다. 거짓은 쉽게 죽고, 진실은 결국 밝혀진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내치(內治)를 대신할 이완구 국무총리가 죽은 자의 첫 표적이 돼 사의를 표명했다. '이틀에 한 번꼴로 전화를 주고받은,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란 거짓은 어떤 부정보다 더한 비난거리가 됐다. 이명박정부에서 거짓해명으로 총리 후보에서 낙마한 김태호 전 경남지사의 선례에서도 학습효과가 없었던 모양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박근혜정부의 인사 난맥상이 첫 국무총리 인사에서부터 시작됐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총리의 임명은 청문회에서 불거진 온갖 의혹에도 불구하고 여당은 국정 혼선을, 야당은 충청권 표심을 우려해 무리한 통과를 강행한 측면이 없지 않다.
이제 넉 달 후면 박 대통령은 집권 후반기에 접어든다. 이 총리의 사의를 받아들일 경우 새 총리 지명과 검증 통과라는 과제부터 매끄럽게 해결한 뒤 집권 후반기를 시작해야 할 판이다.
인사 난맥상으로 인한 국정혼선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좀 더 신중한, 폭넓은 인재 등용이 요구된다. 능력과 도덕을 겸비한 인물이 꼭 '우리 진영' '대선 공신' 안에만 있지는 않을 터이다. 더 넓고 깊게 살핀다면, '장자방' '소하' '한신'이 우리나라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감히 자신해본다.
군주는 무위(無爲)로서 신하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고, 일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한비자가 무위철학을 설파했고, 청나라 강희제가 그랬다. 물론 일만 하지 않는 군주가 능사는 아닐 것이다. 능력 있는 신하를 알아보는 안목과 그들에게 책임과 권한을 대폭 맡길 수 있는 자신감, 끊임없이 격려하고 잘하는지 살펴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선현들은 전하고 있다.
능력과 인품을 겸비했다면 진나라 기해처럼 자신의 정적까지 추천하고, 중용(重用)한 사례가 미국, 유럽을 비롯한 외국에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기해천수'(祁奚薦讐)의 인사발탁까지 통 큰 고려를 해야 할 시점이다. 박근혜정부의 집권 후반기 새 출발을 위한 첫 과제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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