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아의 세상을 비추는 스크린]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입력 2015-04-17 05:00:00

로버트 드니로를 확인하는 251분

애도 주간이다. '세월호' 참사로 꽃 같은 아이들이 사망한 지 1년이 지났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나. 이번 주에는 즐겁고 행복한 영화보다는 인간의 내면과 역사를 성찰하며 함께 눈물을 흘리는 영화를 보는 것이 좋겠다. 최근 감독 편집본으로 복원돼 디지털로 리마스터링한 지나간 걸작 영화들이 활발하게 재개봉하고 있다. 이러한 영화는 중장년 세대에게는 노스탤지어를, 젊은 세대에는 말로만 듣던 훌륭한 영화를 극장에서 직접 확인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번 주 추천할 영화는, 미국 갱스터 영화의 영원한 걸작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이다. 이 영화는 죽음의 그림자, 잠과 꿈의 은유가 곳곳에 스며들어, 림보같이 어지러운 세상에 떨어진 인간의 운명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보게 한다.

학창시절, 용돈을 아껴 일본 판 '로드쇼'를 사서 모았다. 화려한 스타들의 화보를 펼쳐 보는 게 취미였고, 그때 알게 된 배우가 한국에서는 아직 유명하지 않았던 로버트 드니로였다. 일제강점기에 학교를 다녔던 할머니에게 기사를 읽어달라고 졸라댔고, 책에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가 놓칠 수 없는 걸작으로 수록되어 있었다. 잔뜩 기대감을 품고 극장에서 본 영화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고, 나는 나의 미학적 감식안에 실망했으며, 도대체 예술이란 뭔지 영화가 뭔지 해답 없는 의문에 빠져들어 허우적댔다. 실망과 함께 걸작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죄책감이 해소된 것은 나중에 두 권으로 나뉘어져 출시된 비디오로 인해서였다. 그래도 아직 영화는 완성본이 아니었다.

스파게티 웨스턴의 거장 세르지오 레오네는 미국 역사를 다룬 갱스터 누아르 영화를 만들기로 하고, 준비하고 완성하는데 총 13년이 걸렸다. 그리하여 완성된 영화 편집본은 10시간이 넘었다. 이 영화를 그대로 극장에서 개봉할 수는 없는 일. 제작사는 229분으로 분량을 대폭 축소해 칸영화제에 출품했다. 하지만 영화는 미국에서 139분으로 편집돼 상영되었고, 흥행 성적은 처참했다. 우리나라는 가위질을 더해 100분으로 맞추었다. 1985년 당시 내가 본 영화는 봤지만 본 게 아니었다.

이번에 229분 완성본에서 감독의 추가분이 결합돼 재편집 된 진정으로 완전한 판본인 251분짜리로 재개봉된다. 4시간 11분의 러닝타임 중간에 10분 간 인터미션이 있다. 많은 이들이 내 인생의 영화로 이 영화를 꼽는 이유가 있다. 서부극의 대가 세르지오 레오네의 진정한 최고작이며, 플랜스시 포드 코폴라의 '대부'(1972)와 함께 미국 갱스터영화의 쌍고봉임이 분명하다.

1921년 좀도둑질을 일삼다 감옥에 들어가는 소년 누들스(로버트 드니로), 1932년 대공황기 밀주사업을 하는 청년 누들스, 1968년 노년의 누들스가 영화를 끌어가는 화자이다. 뉴욕 빈민가 출신 갱스터들의 우정과 배신, 사랑과 욕망, 절망과 고독을 그린 비극적 대서사시이다. 우아하고 서정적인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 세 개의 시공간을 오가는 유연한 편집, 갈색, 회색조로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며 유려하게 펼쳐지는 촬영 등 모든 부문에 걸쳐 걸작으로서 손색이 없다. 무엇보다 압권은 로버트 드니로의 매혹적인 연기이다. 과묵한 그의 표정은 이야기의 비극성을 진정 어리게 전달한다.

영화는 갱스터 장르로 분류되지만, 화려한 총격전과 액션, 다층적으로 펼쳐지는 농밀한 이야기 전개를 무기로 내세우지 않는다. 광란의 시대인 1920년대, 대공황 시대인 1930년대, 전복의 시대인 1960년대는 미국의 문화가 절정기에 달했던 세 시기이고, 각각 이 시기를 화려하거나 혹은 고통스럽거나 쓸쓸하게 보내는 주인공을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헛된 기대,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을 드러낸다.

제니퍼 코넬리를 훔쳐보는 누들스의 긴장한 얼굴, 꼬마가 총에 맞고 쓰러졌을 때의 분노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 모든 것을 내려놓은 노년의 그의 얼굴, 마지막 아편굴에서 처음으로 보여주는 그의 그의 미소. 로버트 드니로라는 금세기 최고의 메소드 연기자를 통해 지어지는 이 모든 얼굴의 표정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얼굴의 영화이다. 삶과 죽음, 인생과 역사의 회환을 담은 참회록이다. 엔니오 모리꼬네가 작곡한 '데보라의 테마'가 귓가에 쓸쓸하게 머문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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